오시영의 세상의 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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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窓
  • 법률저널
  • 승인 2006.01.0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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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변호사/시인

 

Imagine the Peace World


 
기적과 확률 사이에 혼란의 강이 흐른다. 개의 해 병술년이 밝았다. 물론 음력으로 치는 것이 올바른 것이겠지만, 2006년은 개의 해이다. 어제 같은 오늘이, 오늘 같은 내일이 펼쳐질 또 한 해이지만, 우리는 어제에 한 획을 긋고, 2006년 첫날을 개의 해의 첫날이라고 부르며 새로운 각오와 결단의 계기로 삼는다.


개는 열두 간지의 열한 번째 해당되는 동물로, 邪氣를 막아주는 동물신으로 알려져 있다. 하루의 시간으로 치면 저녁 일곱시에서 아홉시 사이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편안히 쉴 수 있는 시간을 상징하고, 달로는 음력 구월에 해당되어 가을추수 뒤끝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유익한 짐승이다. 달을 보고 짖는 개를 상상해본다. 도둑으로부터 집을 지켜주는 개를 생각해 본다. 주인의 외출 뒤끝에 꼬리치며 달려드는 귀여운 개를 떠올려본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개보다 인간에게 더 가까운 짐승은 없다. 인간에게 헌신하는 충복의 상징이다. 그런데도 왜 개라는 이미지는 그 충실한 충견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창출할 때 사용되는 접두어가 되었을까? 개살구, 개소리, 개수작, 개새끼, 개 같은 놈에 이르기까지, 개자가 들어가면 육두문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옛말에 정승댁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도 막상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주인에게 충실한 개에 빚대어 인간의 야박함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고, 세도가 앞에 아부하는 인간 속성의 비열함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난해 지하철 안에서의 일명 개똥녀 사건이 회자된 바도 있지만, 애완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남다르다. 어쩌면 서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애완견에 대한 사랑을, 생활수준이 높아진 여유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마만큼 사람 사이의 외로움이 깊어지기에 사랑 쏟아놓을 곳이 없어 애완견에게나마 사랑을 주고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병술년 새해 벽두에 인터내셔날 헤럴드 트리뷴지 1월 1일자 전면광고로 게재된 존 레넌의의 Imagine 가사 한 구절의 상징성이 가슴을 파고든다. 비틀스 멤버 존 레넌의 일본인 아내 오노 요코가 신문의 한 면 전체에 단지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라는 이매진의 가사 한 줄을 광고하였다. 모든 이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존 레넌은 광적인 팬에 의해 그의 아파트에서 암살당했지만, 그가 불렀던 노래 이매진은 비틀스의 헤이 쥬드, 렛잇비를 누르고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팝송 1번으로 선정되었다. 존 레넌이 이매진에서 애타게 호소했던 것은 세계평화였다. 국가도 없고, 소유도 없고, 심지어 천국과 지옥의 구별조차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간구하며 서로 죽이고 죽는 일을 그만두자고, 더 많이 갖기 위해 빼앗고 뺏기는 일을 그만 두자고, 굶주림과 배고픔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함께 이루어나가자고 노래했던 이매진으로 인해 종교계로부터 천국을 부정한 자, 무정부주의자로 분류되어 기피인물로 낙인찍히기도 했던 존 레넌이었지만, 그가 죽은지 25년이 지난 뒤, 그의 아내 오노 요코는 이 세상의 평화를 간구하는 메시지를 그렇게 신문의 전면광고로 전하고 있다.


정말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전쟁과 공포가 넘쳐나고 있다. 절대 물량이 없어서도 아닌데도 불평등과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고, 곳곳에서 살육하고 또 살육한다. 진정으로 이 세상에 평화가 넘쳐나기를 간구한다. 모든 세계인들이 꿈꾸고 있는 평화는 이상적으로는 종교계에서 가장 먼저 간구되어야 할 덕목인데도, 종교계가 가장 먼저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단죄하고 처벌하고 가해자가 되고 있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이 세상은 확률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아주 낮은 확률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을 종교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기적이 넘쳐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반지성적이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모르는 세상이 많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고, 까닭에 사람들은 역으로 기적을 믿고 싶어 한다. 유독 우리 한국인은 기적을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많은 듯싶다. 새해 벽두면 점집을 찾는 이들이 많고, 토정비결을 보고, 교회나 사찰을 찾아 기도하는 이들이 늘어난다. 제 마음을 다스리고 스스로 사색하며 자기결단과 자기 내부의 혁신을 꾀하기보다는 신에게 빌고, 외부의 현상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확률의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을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적이라고 믿는 것이야 나쁠 게 없지만, 그로 인해 확률로부터 배제된 또 다른 자를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라고 경멸하거나 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확률의 수혜자가 된 우리 각자 각자는 신의 은총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확률의 우연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일 뿐이니 언제 우리가 확률로부터 배제될지 모르므로 겸손해야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평화를 실천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병술 새해에는 기적과 확률의 강 사이로 평화의 돛단배가 무사히 항해할 수 있기를, 개소리 아닌 사람의 소리를 가슴으로 듣게 되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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