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넘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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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넘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세요
  • 안혜성 기자
  • 승인 2019.05.17 15:36
  •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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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저널=안혜성 기자] 어린 시절에는 항상 상처가 끊이지 않는 아이였다. 뛰어오르고 뛰어내리고, 기어 올라가고 매달리고, 구르고 돌며 놀기를 좋아하는 개구쟁이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유아기에도 쉬지 않고 여기저기 기어 다니다 보온병을 엎어서 팔 한쪽 전체를 데여 부모님의 속을 썩였고, 언젠가 한 번은 책상 위에서 점프를 해서 트리플악셀이라도 하듯이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내려와 멋지게 착지를 하려고 생각했는데 지나치게 씩씩하게 점프를 한 탓에 천장에 머리를 박고 수직 낙하해 바닥에 턱을 찧는 사고를 내기도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고 한심한 사건도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마스크를 하고 하교를 하던 중에 문득 마스크를 눈에 쓰면 후레쉬맨이나 파워레인져 같은 변신용사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황당한 생각을 실행한 결과는 참담했다. 그날 엄마는 가만히 주차돼 있던 자동차 사이드미러에 앞니를 부딪쳐 피를 흘리며 통곡을 하면서 현관으로 들어서는 어린 딸을 맞이하는 웃픈 경험을 하셔야 했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이런 황당한 시도는 (거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조심조심 바닥을 보며 걷지 못하고 늘 다니는 길도 두리번대면서 걷다가 움푹 팬 길에 발목이 꺾이거나 넘어져 무릎이 깨지는 일이 다반사다.

그렇게 두리번대면서 걸었기에 볼 수 있었던 계절별로 다른 풍경과 사람들, 새로 생긴 맛집이나 예쁜 가게, 새와 고양이와 개들의 다양한 표정 등은 늘어가는 흉터와 새로운 상처를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기에 앞으로도 포기할 생각은 없다.

게다가 자주 겪는 일이다보니 발목이 꺾여도 심하지 않게, 조금 보기 흉하게 비틀거리기는 해도 넘어지지는 않도록 균형을 잡는 요령도 붙었다.

남부끄러운 개인적 사고사를 이렇게 구구절절 털어놓은 이유는 ‘넘어지는 경험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얼마전 지방대 출신이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블라인드 테스트라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부족하지 않은 학점이나 영어성적 등에도 불구하고 지방대 출신은 도통 합격을 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출신과 무관하게 실력만 있으면 합격할 수 있는 공무원시험에 지원하려한다는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그 기사를 보다가 2019학년도 로스쿨 입시 결과를 검토하면서 품었던 의문들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나이’와 ‘학벌’은 로스쿨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다. ‘다양한 경험을 갖춘 인재’를 양질의 법학 교육을 통해 법조인으로 양성한다는 로스쿨의 취지를 생각한다면 학부 졸업과 동시에 로스쿨에 진학하고 SKY 학부나, 인서울 로스쿨 인가 대학 출신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현 상황은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로스쿨이 나이와 학벌의 공개를 어떻게든 피하려고 애쓴다.

“좋은 학벌에 나이가 어린 학생들이 더 우수하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 결과를 어쩌겠냐”는 반박도 있다. 앞서 언급한 기사에서도 “고등학교 시절 더 열심히 공부해서 인서울 대학에 간 사람과 놀아서 지방대에 간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취지의 댓글이 달렸다.

그렇다면 로스쿨을 도입한 이유가 뭔가. 시험을 치러서 성적으로 줄세우기를 한다면 적어도 공정성 논란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승복할 수 있는 수준의 엄격한 공정성에서 한 발 물러서서라도 얻고자 했던 다양성이라는 가치는 어디서 찾으면 되나.

현행 로스쿨 입시는 ‘넘어지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완벽한 학점 관리와 변호사의 업무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없는 높은 영어시험 성적, 대학 재학 시절부터 철저히 준비해야 가능한 졸업과 동시에 이뤄지는 로스쿨 입학 등 현행 로스쿨 입시는 주변을 두리번대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눈앞에 놓인 길만을 쭉 따라온 사람에게만 적합하다.

그리고 이는 굉장히 위험하다. 법조인은 누구보다 사회와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춰야 하고 그런 이해를 갖추려면 다양한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직접 몸과 마음으로 부딪치며 얻은 경험은 책이나 매체를 통해 얻는 간접경험과는 차원이 다른 변화를 만든다. 넘어져 본 사람만이 넘어진 사람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고, 많이 넘어져 봤을수록 어떻게 하면 잘 안 넘어질 수 있는지 혹은 덜 다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법조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법조인을 배출하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적 정비가 필요한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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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말임 2019-05-17 17:02:54
다 맞는 말입니다. 안타까운건 현상황에선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거죠. 로스쿨교수들은 자기 밥그릇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있고 로스쿨 취지는 진작에 버려졌는데 개선의 의지도 없으니.

고형 2019-05-18 01:49:00
양심있는 기자 한 분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

맞는말만 엄청써뒀네요 2019-05-17 16:03:05
학점 토익 리트 그 중 학점은 어떤과목을 들어 몇 점을 취득했냐가 아닌 몇 점을 취득했냐에 포커스가 맞춰져있어 입학과 동시에 로스쿨을 준비했다는 친구의 성적표를 본 적이 있는데 전부 학점 잘 주는 교수의과목, 수강인원이 20명 이하인 과목, 개론수준의 과목만을 들었다. 당연 그 친구는 학점이라는 부분에서넘어지지 않았다. 또한 토익은 학원이라는 곳에서 온실속의 화초처럼 길러져 만들어졌다. 리트도 학원의패키지속에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인재가 학원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변호사시장에 나오면 어떻게되겠는가

폐지주장 2019-05-17 19:44:32
[단독] 로스쿨 ‘대학 카스트제’ 내부문건 공개합니다
원문보기: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46727.html?_fr=gg#cb#csidxa610b0276ce7a3a9802ca405608f2a0 \\ “입학점수는 영업비밀” 맞선 로스쿨, 결국 지연배상금 http://m.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083

기회균등 2019-05-17 15:58:45
가슴을 열고 쓰신 글은
독자의 가슴도 열게 하는 것 같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정책결정자들도
가슴을 열고 문제해결에 나선다면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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