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국제정세와 한국이 나아갈 길(9)-비례대표제와 외교 ‘겐셔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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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JUSTICE] 국제정세와 한국이 나아갈 길(9)-비례대표제와 외교 ‘겐셔리즘
  • 신희석
  • 승인 2019.03.2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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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석 박사
전환기정의워킹그룹

※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2016년 4월 1일 무려 18년간(1974~1992) 독일 외교부장관을 역임했던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가 타계했다. 향년 89세.

겐셔 외상은 1970년대 냉전과 데탕트, 1980년대 핵전쟁 위협 고조와 공산권의 민주화에 이은 1990년 동서독 통일까지 격동의 시대에 역사의 주역이었다. 미국 등 서방과의 동맹관계를 굳건히 유지하면서도 소련 등 공산권과도 관계개선에 힘쓴 겐셔의 균형잡힌 실리외교 기조는 ‘겐셔리즘’이라 불린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겐셔는 1982년까지는 사회민주당(SPD)의 슈미트 총리, 그 이후로는 기독민주연합/기독사회연합(CDU/CSU)의 콜 총리 밑에서 외상으로 재직했다. 좌파와 우파 정권, 한국으로 치면 노무현과 이명박 정권, 아니면 박근혜와 문재인 정권을 오가면서 외교수장을 맡은 셈이다.

사실 겐셔 외상은 이념과 정책 면에서 리버럴한 전문직과 기업인의 지지를 받는 좌우 양대 정당 사이의 중도 부르주아 자유민주당(FDP) 총재로 연립정권의 핵심멤버였다. 바지사장이 아니라 연정의 2대 주주로서 외교를 총괄했던 것이다. 1982년에도 콜 총리가 겐셔 외상을 유임시킨 것이 아니라 겐셔 외상이 연정 파트너를 갈아치우면서 콜 총리를 만들었다.

이렇듯 독일에서 킹메이커 겐셔 외상과 겐셔리즘이 가능했던 것은 비례대표제 덕분이다. 이는 최근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유력히 논의되고 있는 선거개혁의 모델이기도 한데, 겐셔의 사례에서 보듯이 선거제도는 국내정치뿐만 아니라 외교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재 국회는 300석 중 253석은 소선거구 단순다수제, 즉 각 선거구에서 1명의 최다 득표 후보가 뽑히고, 나머지 47석은 별도의 정당별 투표에 따라 배분되는 의석수대로 각 정당명부의 후보들이 뽑히게 된다.

그런데 소선거구제에서는 한 표라도 더 많이 받은 후보만이 당선되기 때문에 절반 가까운 표가 휴지조각이 된다. 특히 보수와 진보 진영의 양대 정당 외에 지역 기반이 약한 소수정당은 지지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의석만 차지한다.

헌법재판소는 헌법 제41조에서 보장하는 선거권, 투표가치의 평등원칙에 따라 선거구 인구편차를 줄여왔다(95헌마224, 2000헌마92, 2012헌마190). 미국의 워렌 대법원장(1953년-1969년)은 학교 등의 인종분리에 사망선고를 내린 브라운 판결을 제치고, 선거구 인구편차를 시정한 베이커 사건(Baker v. Carr)과 후속판례를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기도 했다. 같은 논리로 지지 정당에 따른 투표가치의 불평등도 시정될 필요가 있다.

대통령선거도 민주적 대표성, 정당성이 취약하기는 마찬가지다. 1987년 민주화운동과 제6공화국 성립 이후, 7차례의 대선에서 과반 이상 득표자는 2012년 박근혜(51.6%)가 유일하다. 절반 남짓한 지지, 거꾸로 말하면 절반의 반대 속에 당선되면서도 혹자의 지적대로 개헌안·법률안 제출권, 예산권, 인사권, 감사권, 정책결정권을 한 손에 쥔다.

이는 같은 대통령제라 하지만 연방정부와 50개 주정부가 공존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고위 연방공직자 1,200-1,400명이 상원 인준표결을 거치며, 예산 관련 법안은 하원에서 발의되도록 하여 민의 반영과 권력 분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미국과 대조적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렇듯 선거 결과와 비례하지 않는 제왕적 권력은 독이 된다. 집권 초에는 다들 쉬쉬하는 측근 비리, 정책 실패가 레임덕과 함께 하나둘씩 터진다. 탄핵으로 끝난 박근혜-최순실 스캔들은 막장이었지만 제6공화국의 다른 대통령들도 하나같이 중력의 법칙처럼 임기 4년차에는 40%, 5년차에는 30% 지지율을 넘기질 못했다.

국정 운영에서도 5년마다 논공행상으로 전문성 없는 대선 공신들에게 공직을 전리품처럼 하사하는 관행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공과 구분 없는 ‘전임자 흔적 지우기’와 단기 업적 쌓기로 정부 정책의 연속성이나 합리성도 자연히 실종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폐단 때문에 대부분의 선진국, 특히 과거 계급투쟁과 혁명 등 심각한 사회 갈등을 겪었던 유럽 대륙 국가들은 비례대표제와 총리제를 채택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5개국 중 19개국은 헌법에 선거의 비례성 보장 규정을 두고 있으며,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은 헌법에 지방의회 선거에서도 비례성을 보장하고 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민중혁명에 따른 왕정 폐지 직후 실시된 1919년 제헌의회 선거부터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으며, 제헌의회가 채택한 바이마르 헌법 제17조와 제22조는 주의회 및 국가의회 선거에서 비례대표 원칙을 명기했다.

1949년 나치 패망 후 미국·영국·프랑스 점령지역에 수립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은 비례대표제를 복원했다. 그러면서도 대의민주제를 공공연히 부정하던 극우·극좌 군소정당의 난립으로 히틀러 집권을 허용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를 거울삼아 5% 이상을 득표한 정당에게만 의석을 배분하는 높은 진입장벽과 위헌정당해산제도를 도입하였다.

1개 정당이 단독으로 과반의석을 차지하기 어려운 비례대표제의 특성상 전후 독일에서 모든 정권은 2개 이상 정당이 인사와 정책을 조율하며 동거하는 연립정권이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서독 총선에서는 기민련/기사련, 사민당, 자민당만이 5% 저지선을 넘었기 때문에 중도 자민당은 5-11% 득표율에도 자연히 킹메이커가 되었다.

1969년 총선 후, 발터 셸 총재, 겐셔 의원 등이 이끄는 자민당은 제1당인 기민련/기사련 대신에 제2당인 사민당과의 연정을 택했다. 전후 최초의 사민당 총리인 브란트 내각에서 셸은 부총리 겸 외교부장관, 겐셔는 내무부장관을 5년간 역임하면서 당내외의 반발에도 1970년 소련, 폴란드와의 모스크바 조약과 바르샤바 조약 체결,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을 비롯한 동방정책을 지지했다.

1974년 자민당 총재로서 부총리 겸 외상이 된 겐셔는 브란트의 뒤를 이은 사민당 우파 계열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와의 연정을 계속했다. 슈미트 총리와 셸 외상은 동방외교를 계속하면서도 서유럽을 겨냥한 소련의 RSD-10(SS-10)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차원의 미국 퍼싱-II 준중거리 미사일 서독 배치로 맞섰다.

1982년 겐셔 외상은 세금·복지 문제로 사민당과 결별하고 콜 총리와의 연정을 시작했다. 1983년 새 연정은 나토 동맹을 중시하여 압도적 반핵 여론을 등에 업은 사민당의 반대를 누르고 퍼싱 미사일 배치를 의회에서 표결 처리했다.

그러나 콜 총리는 사민당-자민당 연정 하에 뿌리내린 동방외교의 큰 틀을 계승했다. 기민련내 여론이 찬성으로 돌아서기도 했지만 동방외교의 주역인 겐셔 외상이 연정의 노선 변경을 용납할 리도 없었다.

1985년 집권한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관계개선과 군비감축을 위하여 군부의 반발을 누르고 단거리·중거리 미사일의 상호 폐기를 제안하자 이를 위장 평화공세로 본 콜 총리는 시큰둥했지만 겐셔 외상은 ‘고르비’의 개혁개방 의지를 평가하고 콜 총리와 미국 등 우방을 설득했다.

겐셔의 노력은 1987년 단거리 미사일(사정거리 500-1,000km)과 중거리 미사일(사정거리 1,000-5,500km)을 폐기하는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3년도 지나지 않아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의 민주화와 동서독 통일을 용인했다. 미국에서 겐셔의 유화론을 비아냥대는 표현으로 쓰이던 ‘겐셔리즘’은 욕에서 찬사로 바뀌었다.

겐셔는 18년간 독일 외교수장으로서 유럽화합 속의 동서독 통합이라는 이상의 실현을 위하여 평화와 안보, 동맹유지와 적대관계 해소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냉철한 외교를 구현했다. 물론 여기에는 유능한 리버럴 전문직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겐셔 개인의 타고난 역량도 중요했지만 비례대표제 하의 중도정당 당수라는 제도적 뒷받침을 무시할 수 없다.

팩트와 균형감각에 기반한 외교는 말로는 쉽지만 비슷한 이념과 경험을 공유하는 관료나 정치집단은 집단사고에 빠지기 쉽다. 그렇지 않더라도 장기적 국익 차원에서 지지층이 반대하는 외교안보 정책을 혼자 추진하기는 어렵다. 겐셔는 독자적 정치기반이 있는 연정 파트너로서 총리의 조력자이자 견제세력으로서 초당적 외교를 펼 수 있었다.

한편, 연립정권 운영은 협상과 타협이 중요한데, 이는 외교에서 최고 미덕이기도 하다. 특히, 겐셔 외상은 국내 정계에서 제3당 당수로서 연마한 그의 장기를 국제무대에서 발휘한 셈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중도우파 독일인민당(DVP) 당수로서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과 전쟁배상금 경감에 성공한 슈트레제만 외상(1923년-1929년)의 계보를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비례대표제는 정치나 외교의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한국은 협치의 전통이 없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독일 역시 100년 전만 해도 호엔촐레른 가문의 황제가 말 그대로 제왕적 권력을 휘둘렀고, 70년 전 인권을 모든 인류공동체, 평화, 정의의 기초로 천명한 연방공화국 출범 후에도 과연 독일에 대의민주제가 뿌리내릴 수 있을지를 두고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연정이라 할 수 있는 민주당-자민련 정권(1998년-2000년)은 초유의 외환위기를 수습하고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그 주역은 평생을 민주화에 헌신한 김대중 대통령과 5.16 쿠데타를 기획한 김종필 총리였다. 정치와 외교는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말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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