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필동면옥은 왜 ‘반 접시’ 메뉴를 없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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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필동면옥은 왜 ‘반 접시’ 메뉴를 없앴나?
  • 신희섭
  • 승인 2019.01.25 10: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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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한국지정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얼마 전 ‘부름’을 받고 필동면옥에 갔다. ‘냉면신도’들은 이해하겠지만 혈중 메밀 농도가 떨어질 때 냉면 신의 부름이 온다. 그래서 혈중 메밀의 농도를 맞추기 위해 필동면옥을 찾았다. 의례적으로 나의 필동면옥 세트를 주문했다. 물냉면. 만둣국. 제육 반 접시.

여기서 잠깐. 먼저 한 가지 고백 아닌 고백을 한다. ‘냉면신도’로서 나는 필동면옥을 좋아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가는 면발과 함께 은은한 육향이 올라오는 육수의 조합이 좋기 때문이다. 가끔 씹히는 파의 향기와 고춧가루가 더해지면 심심할 새 없이 ‘완냉(한 그릇을 완전히 비웠을 때를 이르는 냉면신도들 간의 용어)’할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냉면과 함께 곁들일 수 있는 음식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우선 필동면옥에는 만둣국이 있다. 냉면 육수를 뜨겁게 하고 거기에 고기와 표고버섯고명을 해서 먹는 만둣국은 차가운 냉면과 조합이 잘 맞는다. 돼지고기 편육과 소고기 편육도 있다. 그리고 냉면과 함께 내주는 슴슴한 맛의 배추김치와 무김치도 이들 음식과 궁합이 잘 맞는다.

세 번째 이유는 이 음식들을 골고루 맛볼 수 있게 해주는 ‘반 접시’ 메뉴가 있다는 것이다. 반 접시? 이건 뭔 소리? 필동면옥은 제육과 수육 그리고 접시 만두를 ‘반 접시’로 판매해왔다. 물론 메뉴판에 따로 기록은 없지만 ‘반 접시’를 주문하면 그렇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반 접시’가 기발하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평양냉면이 유행을 타기 전부터 평양냉면집에 오시는 분들 중에는 실향민 어르신들이 많았다. 여러 분들이 같이 오시는 경우도 있지만 혼자 오시는 분들도 많다. 그런데 이 분들이 냉면만 드시기는 좀 헛헛하고 그렇다고 다른 메뉴 한 접시 추가는 양이 많다. 이럴 때 ‘반 접시’는 아주 절묘하다.

그날. 기분 좋게 주문한 ‘반 접시’ 메뉴가 퇴짜를 맞았다. 잠깐 당황했지만 제육을 안 먹을 수 없어 온전히 한 접시를 주문했다. 왜 반접시가 없어졌는지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필동의 단골로서 ‘반 접시’가 사라진 것이 꼭 우리만의 비밀을 하나 잃어버린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며 주인 분에게 물었다. 왜 ‘반 접시’ 메뉴가 없어졌냐고. 그랬더니 돌아온 답이 좀 놀라웠다. 주인 분은 ‘반 접시’메뉴 때문에 꽤 오랫동안 골치가 아팠다고 한다. 한 접시를 먹고 반접시를 먹었다고 계산하려는 실랑이가 생겨서 손님들과 불편하게 된 경우가 제법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술까지 한 잔한 손님들과 이런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경우에는 큰 고역이었다고.

물론 이런 실랑이가 무조건 손님 탓만은 아닐 것이다. 가게 측 실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동면옥이 ‘노포(老舖: 대대로 물려오는 점포이자 냉면신도들에게는 필수적으로 가보야 할 식당의 한자표현)’인데다 직원들이 꽤 오랫동안 이곳에서 근무해 업무 특화가 많이 되어 상대적으로 실수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냉면집 인기가 좋아 반 접시 대신 한 접시를 판매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노포가 반 접시를 한 접시로 판매한다고 더 큰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단골들 기분만 상하지.

그래서 결론은? 아쉽다. 그것도 매우. ‘반 접시’는 혼자 가서 다양하게 먹고 싶은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좋은 배려의 문화인데 말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가장 단순한 분석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이다. 몇 몇 진상손님들이 반접시라는 배려의 문화를 파괴한 것이다.

일상에는 이런 경우들이 많다. 다른 예를 보자. 최근 워터파크들에는 탈수기가 없다. 없앤 이유가 뭔가 하면 진상 손님들의 보상요구 때문이다. 워터파크에 근무하는 분의 이야기는 이렇다. 진상고객들이 자신의 수영복이 명품인데 탈수기 때문에 손상이 되었다며 고액의 보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쟁들이 잦아지자 워터파크 측에서 탈수기 자체를 없앴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 사례들 중에 실제로 피해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피해 사례가 매해 수십 수백 건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이런 문제는 왜 생기는가? 이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경제학자 맨큐 올슨(M. Olson)의 ‘집합행동’이란 개념을 잠깐 소환한다.

그가 제시한 ‘집합행동(collective action)’은 무임승차(free-riding)를 의미한다. 여기서 무임승차란 집단적인 재화와 효용인 공공재(public goos)산출이라는 비용은 부담하지 않고 편익만을 누리는 현상이다. 국가에 대한 세금납부나 군 복무를 기피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집합행동의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유인(incentive)의 문제다. 사람들은 조직의 사이즈가 커질수록 이 조직에서 얻게 되는 이익(공공재)의 유인이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혜택을 나만 보는 것이 아니니까. 반면에 조직의 사이즈가 작아지면 거기서 얻는 이익(사용재 private goods)의 유인은 크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익은 선별적이라 특별하기 때문이다. 특정 협회에 가입해서 얻는 서비스를 생각해보라. 두 번째 처벌(punishment)의 문제다. 조직이 커질수록 무임승차하는 구성원을 찾아내서 처벌하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반면에 조직이 작아지면 무임승차 자를 발견하고 제명하는 것이 수월해진다.

필동면옥의 ‘반 접시’메뉴가 물론 공공재는 아니다. 식당을 찾아 돈을 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재화이니 반 접시에 담긴 ‘음식’은 사용재이다. 그러나 반접시를 판매하는 문화 특히 ‘배려의 문화’는 공공재이다. 그러니 이러한 배려의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재 혹은 공익의 증발을 의미한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런 집합행동에 대한 해법이 없다는 것이다. 국가가 공권력을 가지고 개입할 문제라면 진상문제를 근절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배려라는 문화에 국가가 개입할 수는 없다. 또한 경제학에서 말하듯이 소유권을 이전할 수도 없다. 이처럼 시장의 유인책이나 국가의 처벌책이 마땅치 않다. 즉 진상대처법이 없다. 말 그대로 문화니까.

살기 팍팍한 시대다. 관용과 배려는 팍팍한 세상을 그런대로 버틸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윤활유이다. 그런데 이런 관용과 배려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그래서 필동면옥의 ‘반 접시’ 메뉴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나만 그럴까?

CF. 지난 칼럼들을 좀 더 보기 편하게 보기 위해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주소는 blog.naver.com/heesup1990입니다. 블로그 이름은 “일상이 정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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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구 2020-09-16 20:18:21
저는 솔직히 당황을 넘어서, 기분이 상하더라구요..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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