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저널 PSAT 전국모의고사 특별연재 1-<언어논리 킬러문항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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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저널 PSAT 전국모의고사 특별연재 1-<언어논리 킬러문항④>
  • 여성곤
  • 승인 2019.01.25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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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곤 PNCS연구소장

2019년도 5급 공채 대비 법률저널 전국모의고사에서 언어논리 대표 감수를 맡고 있는 여성곤 선생입니다. 지난주 시행된 전국모의고사 언어논리 40문항 중 가장 정답률이 낮고, 복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문항에 한해 기고하고 있습니다. 이번 법률저널 제5회 전국모의고사와 관련해서는 문 36, 문 39, 문 2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문항은 정답률 13%로 가장 낮았던 문 36입니다.

문 36.다음 글에 대하여 옳게 추론한 것은?

정치의 목적이 좋은 삶의 구현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옳다면, 가장 훌륭한 시민의 미덕을 발휘하는 사람이 가장 높은 공직과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결론 내리기는 어렵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 참여가 좋은 삶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였는데, 그 이유는 우리 본성은 폴리스에 살면서 정치에 참여할 때만 아낌없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를 꿀벌이나 기타 무리 지어 사는 동물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존재로 본다.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있고, 언어라는 능력은 무엇이 공정하고 무엇이 불공정한지 선언하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오직 정치 연합에서만 인간은 언어라는 고유의 특성을 발휘하는데, 그 까닭은 폴리스에 있을 때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의와 부정을 고민하고 좋은 삶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립된 사람, 즉 혼자서도 만족스러워 정치 연합의 이익을 나눌 수 없거나 나눌 필요가 없는 사람은 폴리스의 일부가 아니며, 따라서 짐승 아니면 신이라고 보았다.

도덕적 삶은 행복을 목표로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쾌락을 극대화하여 고통을 넘어서는 공리주의 행복이 아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대상을 구별할 줄 안다. 만약 누군가 투견을 보면서 쾌락을 느낀다면, 우리는 이를 극복해야 할 악으로 여기지, 진정한 행복의 원천으로 여기지 않는다. 도덕적 우수성은 쾌락과 고통을 모으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구별하여 고상한 것에서 기쁨을 천박한 것에서 고통을 느끼는 데 있다. 행복은 마음 상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이며, ‘미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이때, 미덕은 책이나 가정에서 배울 수는 없고 폴리스에서의 행동과 연습으로만 갖출 수 있게 된다.

① 고립된 사람이지만 짐승이 아닌 경우에는 가장 높은 공직과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다.
②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더라도 책이나 가정에서 배울 수 있는 미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③ 꿀벌에게도 언어라는 특성이 존재한다면, 꿀벌 또한 정치 연합이 없다면 언어라는 특성을 발휘할 수 없다.
④ 언어를 통해 정의와 부정의를 고민할 수 없어도 인간의 본성을 아낌없이 발휘할 수도 없는 것은 아니다.
⑤ 정치의 목적이 좋은 삶을 구현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가장 훌륭한 시민의 미덕을 발휘하는 사람에게 가장 높은 공직과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결론도 내릴 수 없다.

이 문항에 대해서 이의제기가 있었는데 이에 대한 출제자의 답변을 탑재합니다.

[이의제기]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있고 라는 본문의 표현과 대비하여 설문 3의 경우 꿀벌에게도 언어라는 특성이 존재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고 언어라는 능력은 무엇이 공정하고 불공정한지 선언하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서술되어 있고, 정의와 부정을 폴리스라는 정치영역 내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생각할 때만이 언어 고유의 특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꿀벌에게도 언어가 있다면 이는 정의와 부정의, 혹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것이고 이러한 목적은 정치연합이 없다면 달성될 수 없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출제자 답변]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있고 라는 본문 표현에 의해 설문3에서 꿀벌에게도 언어라는 특성이 주어진 경우 언어를 제외한 ‘모든 다른 특성들’도 인간의 경우와 같이 적용된다는 전제를 하신 것 같습니다. “폴리스에 있을 때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의와 부정을 고민하고 좋은 삶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는 해설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서술인데, 왜냐하면 그 앞부분에 “오직 정치 연합에서만 ‘인간’은 언어라는 고유의 특성을 발휘하는데,” 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꿀벌에게도 마찬가지로 언어가 있다 해도 그 특성을 발휘하기 위해 “정치 연합”이 필요하다고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문항은 정답률 27%의 문 39입니다.

존재론적 증명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안셀무스가 구상한 내용은 이렇다. 우리가 절대 완전을 상상할 수 있는 한 그것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신이다. 안셀무스는 존재(Being)의 개념 속에는 반드시 실재(Existence)의 개념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존재론적 증명을 시작하였다.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완전한 존재를 상상해 보라. 당신이 이 문장의 뜻을 이해한다면, 당신은 그러한 존재의 개념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문장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상상하는 이 존재(이하에서 A라 함)는 단순히 상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A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보다 더 완전한 것, 즉 A와 흡사하면서 존재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하는 선(善)은 상상속의 선보다 더 완전한 것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A가 상상이라는 가정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참이라면 우리는 더 완전한 존재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가설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A는 존재한다. 안셀무스는 그것을 ‘신’이라고 정의하였다. 다시 말해, 신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것을 뜻한다. 완전성 안에는 존재라는 성질도 포함되어야 하고, 그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완전성이 결여된 것이므로 신은 존재해야만 한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과거 경험의 유무는 문제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리적 전개가 안셀무스의 증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이 지닌 문제가 된다. 존재를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존재’로 정의해 놓고, 그러한 존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의 정의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7세기가 더 지난 후에 마침내 칸트가 이 증명에 막을 내렸다. 칸트는 안셀무스가 문법적 단위(‘있다’라는 술어)를 존재론적 양으로 취급함으로써 범주를 혼동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칸트에 따르면, 어떤 것이 ‘있다’ 또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에 아무것도 더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과 일치한다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경험이 그것이 실재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경우에만, 우리는 그것이 ‘있다’거나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진술이 참이냐 하는 것은 단어나 개념이 현실 속의 사물과 어떻게 일치하느냐에 달려있다.

요컨대 ㉠, 신에게 존재를 첨가한다고 해서 신이 더 ‘개선’되지는 않는다. 어떤 것을 첨가할 수 있는 ‘신’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존재한다’는 술어가 사라진다면 주어인 ‘신’도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라고 말하는 것도 신에게서 아무것도 ‘빼지’않는다. 우리는 어떤 것을 뺄 수 있는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신’은 문법적인 주어일 뿐이며, 실재하는 주어가 아니다.

바꿔 말하면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진술에도 아무런 논리적 모순이 없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자체의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존재가 객관적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정문 “X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면, 긍정문 “X는 존재한다”는 논리적으로 필요치 않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유일한 검증은 경험뿐이다.

이것으로 사실상 안셀무스의 증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에도 안셀무스의 주장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범주의 혼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 어떤 것도 성공할 수 없었다.

문 39. 윗글의 내용을 통해 적절하게 추론한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보기>

ㄱ. 안셀무스는 일종의 동어반복의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ㄴ.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ㄷ. 완전성 여부에 실재하는지 여부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안셀무스의 주장은 약화될 것이다.

① ㄱ
② ㄴ
③ ㄱ, ㄷ
④ ㄴ, ㄷ
⑤ ㄱ, ㄴ, ㄷ

정답은 3번이었으며, 정답률은 27%였습니다. 반면 5번 선지를 선택한 응시생의 비율은 52.5%였습니다. 결국 ㄴ선지를 잘못 판단하여 틀린 경우입니다. ㄴ선지의 경우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경우에만,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5문단 다섯 번째 문장) 역명제가 되어 틀린 것입니다. 주어진 글에서 칸트의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경우에만, 우리는 그것이 ‘있다’거나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문장을 보는 순간, 이것이 선택지에 활용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는 <보기>의 ㄴ을 간단히 기호화 해보아도 이것이 역의 명제가 되어 틀림을 알 수 있다. 즉 언어논리 출제자들이 선호하는 문장들의 유형을 평소 잘 정리해두었다가 실전에서 빠르고 정확하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습관은 기출을 분석할 때에도 전국모의고사에 응시하여 점검할 때에도 유용하리라 생각합니다.

다음 문항은 문 2입니다.

문 2.다음 글에서 알 수 없는 것은?

영양분은 모두 균형 방정식을 통해 검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칼슘 균형이 계속 마이너스로 유지된다면 뼈에 들어 있는 미네랄 성분을 잃게 되고, 결국 뼈의 강도에 영구적인 문제를 발생시킨다. 영양 균형의 개념은 영양분의 분류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는데, 칼슘과 같은 미네랄의 균형은 음식을 통한 섭취량에서 대소변으로 배출되는 배설량을 뺀 것으로 나타낸다.

뼈는 여러 기능을 하지만 특히 미네랄을 저장하는 거대한 창고 역할을 한다. 그 중에서도 칼슘이나 인이 대표적이다. 뼈의 표면에는 언제나 파골세포가 뼈를 흡수해서 만들어 낸 구멍이 있다. 이 부분을 재형성 공간이라고 부른다. 조골세포는 이 흡수된 구멍을 재형성하게 되고, 조골세포와 파골세포는 일반적으로 평형을 이루고 있다. 만약 뼈의 재형성 속도가 빨라지면 뼈가 저장하고 있던 미네랄 총량이 감소한다. 반대로 뼈의 재형성 속도가 느려지면 뼈의 미네랄 총량이 증가하게 된다.

화학 원소의 균형식은 섭취량에서 배설량을 뺀 것으로 나타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영양분은 화학 원소가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영양분들은 배설되는 양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사되는 양도 차감되어야 한다. 에너지는 영양의 측면에서 보면 아주 극단적인 경우로서, 에너지는 칼슘 원자와 같은 물질이 아니다. 에너지는 다양한 형태로 저장된 후 대사되며, 그 중 몸이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주로 간과 근육에 저장되어 있는 글리코겐과, 지방 조직에 저장된 지방이다. 단백질은 최후의 에너지 저장소로서, 에너지 소비가 극단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오랫동안 기아 상태에 빠지면 근육과 장기에 들어 있던 단백질이 대사된다. 지방의 단위 중량당 에너지는 글리코겐의 단위 중량당 에너지의 9.1배에 달하며, 우리 몸은 이러한 효율적인 저장 매체를 이용하여 몸무게를 가볍게 함으로써 운동에 있어서의 효율도 함께 도모한다.

① 근육에서는 에너지원으로서의 글리코겐과 단백질을 얻을 수 있다.
② 균형 방정식이 성립하지 않는 물질은 우리 몸의 영양분에 해당하지 않는다.
③ 어떤 사람의 지방 저장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에너지의 섭취량이 증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④ 조골세포의 활동이 증가한다고 하여 반드시 칼슘의 균형 방정식에 의해 칼슘 균형이 마이너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⑤ 조골세포의 재형성 속도가 과도하게 빨라져서 뼈의 칼슘 저장량이 감소하였다면, 파골세포를 더 활성화시킴으로써 뼈의 칼슘 저장량을 다시 증가시킬 수 있다.

이 문항에도 이의제기가 있었는데 이에 대한 검수자의 답변을 탑재합니다.

[이의제기]

④의 경우 해설에 칼슘 균형 방정식은 섭취량-배설량과 관계되는 것으로 조골세포와 파골세포의 활동과는 관계없다고 나와 있는데 본문을 통해서는 조골세포와 파골세포가 섭취량-배설량과 관계가 없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생각합니다. 조골세포와 파골세포는 섭취량과 배설량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문장이 주어지면 답이 엄밀해질 것 같은데 해당 지문에서는 조골세포와 파골세포, 섭취량과 배설량 사이에 어떠한 관계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④ 또한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조골세포와 칼슘균형과의 관계는 본문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조골세포의 활동의 증가->칼슘균형이 마이너스가 된다.”는 본문만으로는 진위를 판단할 수 없는 문장이 됩니다.

[검수자 답변]

칼슘 균형은 음식을 통한 ‘섭취량’에서 대소변으로 배출되는 ‘배설량’을 뺀 것입니다(1문단 마지막 문장). 조골세포와 파골세포는 일반적으로 평형을 이루고 있고(2문단 다섯 번째 문장), 이는 섭취량과 배설량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골세포의 활동이 증가한다고 하여 반드시 칼슘의 평형 방정식에 의해 칼슘 균형이 마이너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선택지의 내용과 해설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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