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퇴계처럼』을 읽고 : 지식의 위대함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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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퇴계처럼』을 읽고 : 지식의 위대함에 대해
  • 신희섭
  • 승인 2019.01.18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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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한국지정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1570년 12월 8일. 아침 무렵 퇴계선생은 평상시처럼 제자들에게 분재 매화에 물을 주라고 했다. 그리고 오후 5시. 눈이 오던 그 시각에 퇴계선생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자리에서 일으켜달라고 했다. 그리고 앉은 채로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제자들이 남긴 퇴계 선생의 세상과 마지막 모습이다. 매일 하던 일상대로 매화에 물을 주는 일을 하고, 선비로서 꼿꼿하게 정좌를 하고 선생은 세상과 이별하였다. 이 장면은 소크라테스의 죽음 장면만큼이나 장엄하다.

그렇다. 장엄하다. 이 장엄함은 인간이 자신의 죽음마저 초월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조선 성리학을 완성한 퇴계 선생은 그렇게 자신의 죽음마저 자신이 믿었던 지식의 세계를 따랐다. 바로 ‘지식’이 선생으로 하여금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그 시간마저 초월하게 하였다.

나는 퇴계의 학문 세계를 구체적으로는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가 추구한 학문의 세계와 진리의 세계가 무엇이었든 그는 그 진리의 세계를 믿었고 그에 따라 살았으며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도 그 지식이 가르쳐주는 대로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세상 만물의 이치를 따른다면 한 사람에게서 죽음의 의미가 따로 어디 있겠는가!

위대한 인간을 한 명 만났다. 모처럼.

『퇴계처럼: 조선 최고의 리더십을 만난다』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이 책은 조선 유학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퇴계선생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이 위대한 사상가의 사상과 학문 세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아니다. 다만 퇴계가 행한 행동을 통해서 지식인의 실천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에피소드 중심으로 퇴계 선생을 소개하고 있고 선생과 관련된 글이나 사진들을 첨부하여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 덕분에 퇴계 선생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지식에 대해 생각할 기회도 생겼다. 특히 두 개의 일화가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는 은어와 관련된 일화이다. 퇴계의 고향 집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고 낙동강에는 은어가 많이 났다. 그런데 은어는 임금님 진상품이어서 법으로 백성들은 은어를 잡지 못하게 금지되고 있었다. 아이들이 이런 법을 알리 없으니 강에 나가 멱을 감을 때면 은어를 잡곤 했다. 퇴계 선생은 은어를 잡은 아이들에게 “국법을 어기면 안 된다”며 혼을 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노인이 아이들을 꾸짖는 퇴계에게 말했다. 말의 요지는 이랬다. 여름철에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멱을 감다보면 물고기를 잡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인데 아이들이 은어를 잡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소. 문제가 된다면 이런 부자연스러운 법을 만든 나라가 더 문제가 아니요.

퇴계는 노인의 말이 지극히 옳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렇게 잘 못 만들어진 법도 법이니 이런 법 또한 지켜져야 하며 만약 악법이라 해서 안 지킨다면 나라는 어찌 되겠냐고 이야기 했다. 노인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이후에도 아이들을 타이르고 꾸짖었지만 고쳐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퇴계는 자신의 아이들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국법을 어길까하여 낙동강에서 멀리 떨어진 죽동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지켜야할 것과 지켜지지 않을 것 사이에서 퇴계선생은 어떤 마음이었겠는가!

두 번째 일화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두 번째 부인과 관련된다. 퇴계의 첫 번째 부인은 둘째 아들을 낳고 한 달쯤 지나 사망했다. 이후 퇴계는 재혼을 했는데 재혼 상대는 안동 권씨 권질의 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문상을 가는 퇴계가 닳아서 해진 도포를 기워달라고 하자 부인은 그 자리에 빨간 헝겊을 덧대어 주었다고 한다. 성리학의 대가가 예의 법도를 모를 리 없고 다른 이들이 그를 어떻게 쳐다볼지 뻔 했지만 퇴계는 말없이 그 도포를 입고 나갔다고 한다. 어떤 사연이 있어 퇴계 선생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마음은 어떠했을까!

두 가지 일화들과 삶의 마지막 순간 퇴계의 모습은 지식에 대해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공부를 하여 지식을 얻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정리해보면 지식이 줄 수 있는 것에는 3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힘이다. 지식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지식은 모르는 사람을 지배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세상의 원리를 통해서 세상을 통치할 수 있게 한다. 둘째는 아름다움이다. 지식 자체가 아름다움일 뿐 아니라 지식은 아름다움을 준다.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무엇이 인간의 본질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다. 아는 것 그 자체에는 숭고함이 있다. 사람들이 지식을 통해 권력을 가지지 못해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다. 그래서 지식이 주는 아름다움이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 셋째 자유다. 그렇다. 지식은 세상의 이치와 인간에 대해 알려준다. 그래서 세상속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준다. 이로서 자신과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자신을 알게 됨으로서 자신을 구속하는 상념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지식이 주는 자유는 권력과 아름다움을 넘어선다.

퇴계선생의 일화들 속에서 나는 권력과 아름다움을 뛰어 넘어 자유를 찾은 지식인의 모습을 본다. 퇴계선생은 72번이나 벼슬을 거부했다. 이는 지식을 탐구하기 위한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선생은 지식이 주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퇴계 선생은 여기서 하나 더 나갔다. 자신이 평생을 통해 탐구했던 지식 속에서 자유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행동과 자연스럽지 않은 법규사이의 번민에서의 자유를. 그리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서의 자유를.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만난 인간 존재 자체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퇴계선생은 행복했을 것이다. 자신이 믿었던 그 지식 안에서 자신이 뜻 한 대로 마지막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 지식인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지식의 위대함을 알려주었다. “공부를 하는 평범한 한 인간인 나도 지식을 통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퇴계선생은 그렇게 한 가지 질문을 내게도 던져주었다. 아주 커다란 질문을.

CF. 지난 칼럼들을 좀 더 보기 편하게 보기 위해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주소는 blog.naver.com/heesup1990입니다. 블로그 이름은 “일상이 정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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