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희 부장판사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1.
“따님이 사망한지는 얼마나 되셨지요?”
“9개월 되었습니다.”
“피해자 유족은 누구누구가 있으세요?”
“저 하고, 애들 엄마하고, 그 애 동생이 있습니다.”
“피해자 아버지 되시는데, 법정에 직접 모셔서, 피고인에 대한 의사가 어떠신지 들어보려고 증인으로 오시도록 했습니다.”
“네.”
“현재도 피고인에 대해서 처벌을 원하시나요?”
“네.”
“혹시 그 이유를 말씀해 줄 수 있으실까요?”
진정서에서 글씨로만 접하던 그 아버지를 막상 법정에서 직접 대하니, 고통에 시달려 거무죽죽해진 낯빛이며, 일그러진 채로 굳어진 그 표정이며, 차마 계속 질문을 하기도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억울하게 죽은 제 딸의 영혼을 생각하시어 현명한 판결을 부탁드립니다’라며 피고인을 엄벌에 처해 달라고 여러 차례 진정서를 냈던 아버지였지요.
피고인을 엄벌에 처해 달라고 피해자 유족이 수차례 진정을 냈다면, 판사로서는, 아 피해회복이 되지 않았구나, 피해자 측에서는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는구나, 하고 이해하면 될 터인데, 왜 굳이 죽은 피해자 아버지를 법정에 불렀느냐구요?
네,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2.
사실 그 사고는 피고인이 잘못을 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차에 치인 피해자의 과실이 더 컸던 교통사고였어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피해자의 사망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고, 그로써 피해자의 가정은 물론, 운전자였던 피고인의 가정도 그 일로 함께 고통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버렸지요.
피해자 아버지처럼 피고인에게도 두 딸이 있었어요. 그날도 식구들을 위해 겨울 새벽 칼바람 속에 출근 길 운전대를 잡았던 것이었어요. 마침 피해자도 새벽에 알바 나간다고 급히 길을 건너다 피고인의 차에 부딪히게 된 것이었죠. 피고인은 딸 같은 피해자의 마지막 모습, 도로에 쏟아진 도시락, 그 때의 장면들이 자꾸 떠올랐어요. 그 사고 이후 사람들이 자기 차에 뛰어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운전대를 다시 잡지 못했고, 그 때문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것은 물론 취직도 어려워 일용직 막일로 전전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형사재판의 피고인이 된다는 것이 주는 두려움과 중압감을 견뎌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어요.
아무리 피해자 과실이 크다고 하더라도 교통사고치사사건인데 무거운 벌을 받지 않을까, 혹시 구속이 되면 어떡하나, 만약 감옥을 가게 되면 아직 어린 두 딸과 아내는 어떻게 살아가나, 이런 걱정과 두려움에 짓눌려서 불면증 약을 먹기도 하고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어요.
피고인은 반성 정도를 넘어서 죄책감에 스스로를 괴롭힐 정도였고, 피해자 유족에게도 잘못을 빌고 용서를 받고 싶었지만, 피해자 유족들은 피고인의 사과를 받아 주지 않았고 합의해 주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엄벌 진정서를 반복해 내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 피고인 때문에 그 아내와 어린 두 딸도 재판에 연일 탄원서를 내고 있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고, 그러다가 불행하게 이런 사고가 났다는 것을 생각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아이들을 봐서라도 실형만은 면하도록 너그러이 선처해 주세요.’
‘딸에게 성실한 모습을 보여준 우리 아빠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가족이 계속 함께 지낼 수 있게 해 주세요.’
3.
그런데 왜 피해자 아버지는 피고인에 대해 그렇게 마음이 굳게 된 것일까요?
네, 그것이 바로 피해자 아버지를 법정에 양형증인(양형사유의 심리에 필요한 증인)으로 소환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비극이라고 해야 할지, 피고인은 형 선고를 받을 위험 앞에 놓인 자신의 절박한 처지와 입장에만 매몰되어 시야가 협소해 진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수차 시도에도 불구하고, 딸을 잃은 부모에게 사과와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데에 결국 실패하고 만 겁니다.
사과의 말을 충분히 마치기도 전에 변명의 말이 나오고 피해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이 새어 나와 버렸죠. 위로의 말을 제대로 건네기도 전에 어느새 자신의 힘든 처지와 상황을 나열해 버렸고요. 미처 사과를 받아들이기도 전에 용서를 재촉하는 마음이 앞서기도 했지요.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기다려 주었어야 할 때에 앞서 성급히 합의금 얘기가 나오곤 했습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사고의 경위를 잘 알고 있었고 자식의 과실을 크게 상계하고 배상한 보험회사의 제안도 그냥 받아들였을 정도로 피고인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피고인의 서투른 말들은 자식을 잃은 비통함 속에 있는 부모로서 참고 받아들일 만한 사과와 위로의 말들이 되지 못하고 그저 비수가 되어 또 다른 상처를 내는 비극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한 피해자 유족들은, 경찰, 검찰을 거쳐 법원에 오는 동안, 여러 차례 반복하여 피고인에 대한 엄벌 진정서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런 피해자 유족의 행동에 더 궁지에 몰렸다고 느낀 피고인은 피해자와 피해자 아버지에 대한 원망감에 비난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게 악순환이 되면서 서로 관계가 더 나빠지고 서로에게 주는 고통이 더 커진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피고인에 대한 양형사유, 특히 ‘피해회복 여부’, ‘피고인의 실질적 피해회복 노력과 정도’를 어떻게 판단할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4.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해자 아버지가 반복해서 낸 진정서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내 딸이 과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었는데 사과나 미안함이 보이지 않는 것을 참기가 어렵습니다.’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면 같이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원만히 합의해 줄 텐데 진심이 없어 보입니다.’
‘자식 잃은 부모로서 진정한 사과와 용서를 바라는데 적반하장이니 합의나 용서를 못하겠습니다.’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진심어린 마음으로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을 뿐입니다. 벌써 9개월이 흘렀지만 제 아내는 정신과 약으로 겨우 버티고 있습니다. 아직 꽃다운 나이에 간 딸을 생각하면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데, 가해자도 우리의 이 고통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피고인을 부디 엄벌에 처해 주십시오.’
저는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 보았지만 그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인지 헷갈렸습니다. 딸을 보낸 슬픔과 아픔 속에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잘 이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만, 그 아버지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웠습니다.
분명 그 아버지는 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원하는 의사의 표현을 명시적으로 여러 차례 반복해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진심어린 사과’를 원할 뿐이라고 마찬가지로 반복해서 수차례 말하고 있었던 거지요. 제가 이해하기로 그 아버지는 분명, ‘피고인으로부터 진심어린 사과의 말을 듣는 것’을 원하고 있었고, 그 또한 명시적으로 계속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피고인에 대해 종국적으로 처벌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진심어린 사과를 원하고, 피고인으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받는다면 피고인을 용서하겠다는 것인가.
아니, 피고인으로부터, 즉 딸에 대한 가해 당사자 본인으로부터 꼭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싶고, 받아야 하겠다, 받아야 마음이 좀 풀리겠다는 것인가, 그런 의미의 사과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인가.
그 아버지가 낸 진정서를 반복해서 읽어 볼수록, 피고인으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듣고 싶다는 말이, 단지 그러면 합의해 주고 아니면 안 해 주겠다는 식의 단순한 조건문이라거나 피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행하게 일찍 간 딸을 위해서, 그 딸을 잃은 부모와 남은 유족인 자신들을 위해서, 바로 그 해당 행위를 한 당사자로부터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어린 사죄의 말을 듣는 것, ‘제가 당신에게 잘못을 했습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하는 진심어린 마음과 그 표현을 듣는 것 자체를 필요로 하고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피해자 유족의 표면적인 의사(意思)는 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구하고 있으나, 피해자 유족이 진짜 원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니즈(Needs)는 ‘가해자로부터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는 것’과 그를 통한 위로(라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마음의 치유와 회복)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이를 그 아버지가 낸 숱한 진정서들 사이에서 발견하였고, 그 아버지를 위해서나 피고인을 위해서나 이를 확실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형 선고 전에는 그들에게 그러한 기회와 시간을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어렵게 그 아버지를 양형증인으로 채택하여 소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5.
이 재판을 했던 때가 벌써 5년도 넘었습니다마는, 그 두 분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왜냐하면 제 재판의 피해자, 피고인이었음에도 그 두 분이 보여 준 용기와 그로 인한 변화에 저는 깊이 감동하였고 인간적으로 참으로 존경스럽다는 마음이 올라왔었던 특별한 기억 때문이지요.
비록 형사사건이긴 하였지만 이 사건 같은 교통사고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살다가 언제든 그 피해자 아버지나, 또는 피고인이 된 아버지와 같은 입장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저도 그 두 분처럼 어떤 한계와 문제 안에 불가피하게 갇혀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런데 과연 저는 결국에 그 두 분처럼 아름다운 결말을 맺을 용기나 힘을 낼 수 있을까에 관해 생각해 보면, 글쎄요, 솔직히 장담을 못하겠더군요.
그 두 분이 대체 어떤 결말을 맺었기에 이와 같은 얘기를 하느냐구요?
네, 다음 회에 계속 이어서 이 두 분의 이야기를 마저 따라가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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