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제주도 영리병원개설과 공론조사 위원회
상태바
신희섭의 정치학-제주도 영리병원개설과 공론조사 위원회
  • 신희섭
  • 승인 2018.12.07 10: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희섭 정치학 박사
한국지정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영리병원이 국내에 개설된다. 제주도에 국내 첫 투자개방형 병원(영리병원)의 개설이 허용되었다. 그동안도 논쟁이 많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논쟁이 예상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영리법원 설립과 관련한 역사가 길다.

2002년 김대중 정부가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경제자유구역이라는 특별한 지역에 영리법원 설립을 허용한 것이 시작이다. 2006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제주도 도지사의 허가를 받아 제주도에 외국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도록 하였다. 2012년엔 중국 상하이시가 지분을 가진 녹지그룹이 제주시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와 제주헬스타운조성에 투자합의를 했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때 녹지국제병원개설이 논의되어 보건복지부는 제주헬스케어타운내 녹지국제병원 건립 사업을 승인했다. 승인을 받은 녹지제주헬스케어타운은 헬스타운부지 내에 5천 평이 넘는 규모(1만8253㎡)로 병원을 준공하고 2017년 8월 28일 제주도에 개원 허가를 신청했다. 이후 제주도는 문재인정부와의 의견조율을 이유로 6차례 법정처리기간을 미루었다. 2018년 3월에 제주도는 숙의형 공론조사를 거쳤고 10월 실시된 제주도민 공론조사에서 58.9%가 영리병원개설을 반대하자 공론조사위원회는 “녹지국제병원을 비영리병원으로 활용하라”고 영리병원개원을 불허의 권고를 내렸다. 당시 원희룡 지사는 시민들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다 2018년 12월 5일 원희룡 지사는 기존 입장을 바꿔서 ‘외국인 전용’이라는 조건을 달아서 영리병원 개원을 허가했다.

제주도의 영리병원 개원이란 주제는 복잡하다. 이것은 많은 논쟁거리를 가지고 있다. 논의의 핵심은 ‘의료 공공성과 의료 양극화우려 vs. 외국인 투자 유치와 정부정책의 신뢰성’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하지만 이 칼럼에서 의료의 ‘공공성’ 여부는 논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원희룡 지사의 정책 선회의 잘잘못도 쟁점이 아니다. 이번 주제는 정책결정의 한 가운데 놓인 공론조사 즉 ‘숙의형 공론조사’에 관한 것이다. 원자력발전 ‘공론화위원회’와도 같은 주제이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도민들의 공론조사에 대해 입장을 바꿨다. 이런 정책 선회는 ‘의료공공성’ 쟁점이 아닌 다른 비판지점을 만들어 향후 논쟁을 격화시킬 것이다. 다양한 비판들이 있겠지만 핵심은 “공론조사를 번복하는 것이 진짜 문제가 될까?”에 있다.

첨예한 이슈를 다룰 때 논쟁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단순화이다. 단순화를 위해서는 이론이 유용하다. 제도의 원 목표와 운영방식은 이론의 세계에서 객관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면 공론조사를 살펴보기 위해 심의민주주의라는 이론을 다루어야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심의민주주의 즉 '심의(deliberation)'를 주인공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어렵다는 것이다. 3가지 점에서 어렵다. 첫째, 개념이 어려워 간명한 이해가 어렵다. 둘째, 심의의 조건을 맞추기가 어렵다. 셋째, 결과도출이 어렵고 결과의 구속력이 문제가 된다.

먼저 심의민주주의는 단순한 토의(discussion)를 넘어 심의(deliberation) 즉 심사숙고(다른 용어로 숙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심사숙고라는 것이 그저 오랫동안 이야기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심의’ 혹은 ‘숙의’를 한다는 것은 공동체가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결정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깊이 있는 논의는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개방적 자세. 대화를 하는 이들이 상호 대등한다는 인식, 나의 주장이 틀릴 수 있다는 지적인 겸허함, 입증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객관성, 구체적인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겠다는 엄정함 등을 구비해야 한다. 물론 이런 입장은 심의 혹은 숙의민주주의 중에서도 ‘엘리트 숙의민주주의’에 해당한다는 비판이 있다. 즉 법관이 판단을 내릴 때 혹은 국회의 대표들이 판단 내릴 때나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에게 해당하는 ‘민중적 심의민주주의’에도 심의는 요구된다. 심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경제적 합리성(rationality)'이 아니라 '사회적 합리성' 즉 '성찰성(reflexivity)'에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용어인 성찰성은 우리가 무엇을 먼저 맞고 틀리다고 재단하지 않고 대화와 논증을 거치면서 그 타당성을 확보해갈 수 있다는 지적 자세이다. 이 지점이 두 번째 조건 구축의 어려움이다.

이때 과연 일반인들이 성찰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는 비판의 핵심이 아니다. 일정한 교육을 받은 시민들, 공동체의 관심을 가진 시민들이라면 성찰성이란 어려운 개념이 없이도 공동체를 위해 무엇이 타당한지 지적으로 열린 입장을 가질 수 있다. 예전 어른들은 교육을 많이 받지 않았지만 “덕 있게 사는 법”을 가르쳤으니 꼭 개념학습이 심의의 전제는 아니다.

이 보다 문제는 이렇게 공론화를 거쳐 도출된 결론의 위상과 쓰임새이다. 세 번째 어려운 점이다. 롤즈(John Rawls)가 지적했듯이 심의는 시민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본래 ‘대의’민주주의에서 심의는 의회가 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은 대통령제임에도 국무회의라는 의원내각제의 심의장치를 가지고 있으니 이 또한 심의 기구이다. 그런데 ‘시민- 의회- 국무회의’가 어떤 사안에 대해 각기 다른 의견을 내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조건 시민들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가? 시민들만 정당하고 시민이 선출한 의회와 시민이 간접적으로 선출한 국무회의는 정당하지 않아서, 시민들의 의견만을 따라야 하는가? 심의민주주의의 대가이며 시민사회 이론가인 롤즈도 이런 상황을 상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고통스럽지만” 의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유는? 법 제정은 결국 의회의 권한이기 때문에.

이 지점이 심의민주주의 제도들의 정치적 활용방식이 도출되는 영역이다. 만약 대표가 자신의 입장과 여론의 방향이 맞으면 대표는 반대파에 대한 정당화수단으로 심의민주주의 장치를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회 vs. 대통령 + 시민’의 조합으로 정책방안이 도출된다면 시민의 공론조사는 대통령에게 유용한 정치적 자원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의회 vs. 대통령’의 대립으로 교착상황이 되면 시민들의 공론조사는 교착을 푸는 해결점이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대통령은 지지표를 구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입장과 시민의 입장이 배치된다면 정치대표가 이 정책을 공론조사에 의뢰하겠는가! 자신의 반대 의견이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할 용기를 가진 대표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대표는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를 시민들에게 던질 수 있다. 이때 심의장치는 책임을 피하기 위한 안식처가 될 수도 있으며 극단적으로는 심의절차가 정치이슈의 ‘쓰레기 하치장(dumping ground)’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공론조사는 이름을 무엇으로 붙이든 권고일 뿐이다. 왜? 정치적 ‘결정’권한을 부여한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에서 결정은 대표에게 위임되어 있다. 그러니 공론조사는 시민들의 의견을 한 번 들어보는 기회로 대의민주주의를 보강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표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현재 한국이 쓰는 심의민주주의는 서구에서도 이론과 제도 모두 시험 운행 중이다. 문제는 대표들이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까에 있다.

CF. 지난 칼럼들을 좀 더 보기 편하게 보기 위해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주소는 blog.naver.com/heesup1990입니다. 블로그 이름은 “일상이 정치”입니다.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