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경산이 담은 풍물 - 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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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JUSTICE] 경산이 담은 풍물 - 동강
  • 호문혁
  • 승인 2018.12.0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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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문혁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前 사법정책연구원장
前 서울대 교수협의회 회장
제1대 법학전문대학원협의회 이사장

※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1999년 4월 서울대 대학신문 주간으로 일할 때 ‘동강을 살리자’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1993년에 영월 지방에 큰 홍수가 난 뒤에 정부가 동강에 댐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동강댐은 지역 주민들과 환경단체 등이 격렬히 반대하면서 전 국민이 관심을 가진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대학신문에서도 동강댐을 반대하는 사설을 쓴 것이다. 그 사설을 실은 신문이 발간된 월요일 저녁에 주간, 부주간, 자문위원, 간사, 학생기자 전원이 모여서 평가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책상에서 말로만 동강댐을 논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교수들이 직접 동강에 한번 가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일은 급진전되어 대학신문 전임 주간 오생근(불문과), 전임 자문위원 이흥재(법학과), 현 주간 호문혁(법학과), 부주간 허남진(철학과), 자문위원 이창복(해양학과), 장경렬(영문과), 강명구(언론정보학과) 교수가 4륜구동차 두 대로 동강 문희마을로 향했다.
 

4월이라 아직 나뭇잎이 돋아나기 전이어서 U자 모양으로 흐르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사진1).

가는 길에 안흥에 잠시 들러 그 때 한창 뜬 안흥찐빵 원조집을 찾아 한 상자 사 먹으면서 길을 재촉했다. 본래 찐빵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 나도 원조집 안흥찐빵을 먹고는 썩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팥알을 씹는 맛이 다른 찐빵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안흥을 지나 무사히 문희마을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는 바로 나의 애기 FM2를 메고 강을 건너 백운산 중턱으로 올라갔다. 산에서 내려다 본 동강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4월이라 아직 나뭇잎이 돋아나기 전이어서 U자 모양으로 흐르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사진1). 흐름의 바깥으로는 가파른 절벽이 둘러쳐 있고, 안으로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사진2).

흐름의 바깥으로는 가파른 절벽이 둘러쳐 있고, 
안으로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사진2).

강 건너에는 문희마을 우리 숙소가 내려다보였다(사진3).

강 건너에는 문희마을 우리 숙소가 내려다보였다(사진3). 이 마을은, 동강 유역의 마을이 다 그렇지만 부근에 기차가 들어와서 수운(水運)의 역할을 다 한 뒤에는 사람의 왕래가 매우 드문 오지가 되어서 마을을 지키던 개의 이름 ‘문희’가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나마 사람들이 마을을 떠난 지 오래돼서 허물어져 가는 집이 곳곳에 보였다(사진4). 눈에 띈 것은 사람이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데 새로 줄 맞춰 심은 듯한 별로 크지 않은 나무들이 여기저기 서 있는 모습이었다. 이상해서 물어보니 집을 버리고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동강 댐 건설 계획이 발표되자 살던 마을에다 새로 심었다고 했다. 그러면 나무 값까지 쳐서 보상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 같은 백면서생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기법(?)이었다.

그나마 사람들이 마을을 떠난 지 오래돼서 허물어져 가는 집이 곳곳에 보였다(사진4).

주변의 산과 마을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두워진 강 건너에서 깜박이는 불빛이 점점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물어보니 이 숙소에 머문 강원대 동굴탐사 팀이 백룡동굴을 탐사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 이창복 교수가 혹시 우경식 교수가 이끄는 팀일지도 모르니 기다려보자고 했는데, 예상이 맞았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백룡동굴 설명을 들었는데, 말만 들어도 너무 좋은 것 같아서 내일 우리를 동굴로 안내해주면 안 되겠냐고 했다. 그러나 우 교수 팀은 내일 아침에 떠나야 된다고 했다.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올까 아쉬워하며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밤새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 이 마을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이 물에 잠겼다고 했다. 떠나려던 강원대 팀이 하는 수 없이 더 머물게 되자 우리가 또 우 교수를 졸라서 동굴 탐사 승낙을 받아냈다. 세상에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강가에 나가 나룻배 타기 전에 여기저기 둘러보고는(사진5),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여기는 물살이 세서 나룻배도 노를 저어서는 갈 수가 없고 양쪽 기슭을 밧줄로 연결하여 줄을 잡아당겨 건너야 했다. 밧줄이 급한 물살과 부딪혀 튕기는 모습도 볼만했다(사진6).

강가에 나가 나룻배 타기 전에 여기저기 둘러보고는(사진5),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밧줄이 급한 물살과 부딪혀 튕기는 모습도 볼만했다(사진6).

백룡동굴은 백운산에서 ‘백’자를 따고 발견자인 우리 숙소 주인의 이름에서 ‘룡’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강에서 10여 미터 쯤 높은 곳에 입구가 있는데, 철문에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게 이 동굴을 발견한 우리 숙소 주인이 설치해 두었다고 한다.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아무런 조명시설이 없어 완전한 어두움 속에 갇히게 되었다. 탐사팀이 갖고 들어간 성능 좋은 손전등에 의지해서 조심조심 걸어갔다. 한참 걸어가니 사람이 하나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구멍이 있었다. 이 구멍을 엎드리건 눕건 해서 지나가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제가 둘 있는데, 하나는 그 구멍 바닥에 흙탕물이 고여 있어 옷을 다 적실 각오를 해야 한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내가 들고 들어간 FM2를 안고는 구멍 통과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할 수 없이 카메라는 경험 많은 탐사대원 중 한 학생에게 맡기고 나는 누운 채로 발로 땅을 밀어서 겨우 그 구멍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불과 몇 미터 뒤에 똑 같은 구멍이 또 하나 흙탕물 바닥 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흙강아지가 됐는데, 에라 모르겠다’하면서 다시 누워서 그 구멍을 통과했다. 그러면서 나보다 체구가 훨씬 큰 어느 교수가 통과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을 했는데 미꾸라지처럼 날렵하게 빠져 나가는 것이 몹시 신기하기도 했다.
 

다른 동굴에서는 못 본 달걀후라이와 신기하게 똑 같이 생긴 석순들을 발견했다(사진7).
촛대 모양의 석순이 즐비하게 서 있다(사진8).
어떻게 이런 모양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한 동굴방패라는 석주(사진9).

정작 동굴 안은 신비로운 광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런 조명이 없어 탐사대원들의 손전등에 의지했지만 오히려 조명이 없어 더 신비한 것 같기도 했다. 사진을 찍으려면 당연히 플래쉬가 있어야 해서 탐사대원의 니콘 플래쉬를 빌려서 달고, 순 수동인 FM2라서 대충 짐작으로 조리개 많이 열고 타임도 길게 잡고 찍었다. 초점을 맞추려면 당연히 앞 피사체가 보여야 하는데, 역시 탐사대원이 손전등으로 비춰주어서 비로소 가능했다. 이 동굴이 발견되자 어떤 경찰 고위 간부가 안에 들어가 그럴 듯이 잘 생긴 남근석을 톱으로 잘라 가져갔다고 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 종유석을 넣고 탕이라도 끓여 먹은 것일까? 스스로 생선가게를 맡은 고양이라고 생각했을까? 불쌍한 사람 같으니라구… 들어가다가 다른 동굴에서는 못 본 달걀후라이와 신기하게 똑 같이 생긴 석순들을 발견했다(사진7). 그 밖에도 촛대 모양의 석순이 즐비하게 서 있고(사진8), 어떻게 이런 모양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한 동굴방패라는 석주와(사진9) 두드리면 길이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난다는 피아노형 종유석(사진10) 등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걷기도 하고 기기도 하고 허리를 굽히고 엉거주춤 걷기도 하면서 동굴의 끝까지 들어가서는 한참을 주저앉아 쉬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땅강아지가 다 된 동굴 속의 우리 일행의 모습을 담아두지 않을 수 없어서 한 장 찍어 두었다(사진11).

두드리면 길이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난다는 피아노형 종유석(사진10).
아무리 피곤해도 땅강아지가 다 된 동굴 속의 우리 일행의 모습을 담아두지 않을 수 없어서 한 장 찍어 두었다(사진11).

그 당시로서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동굴을 하늘이 도와 구경할 수 있었고 도무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깜깜한 동굴 안에서 탐사팀의 도움으로 많은 사진을 남길 수 있었으니 참으로 운이 좋았다. 대학신문 사설로 동강댐 건설 강행을 막는 데에 미미하나마 도움을 준 공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다녀온 뒤 한 동안 동굴 보호를 위해 완전히 폐쇄했다고 들었을 때는 진한 아쉬움이 들면서도 더 행복하기도^^ 했다. 지금은 동굴 밖에는 생태체험학습장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시설을 해서 백룡동굴 탐사를 제한된 인원이지만 쉽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동굴 탐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기 위하여 문희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멀리 못 가서 앞에 찻길이 물에 잠겨 있었다. 강명구 교수가 그 깊이를 알아보려고 바지를 걷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무래도 위험해서 도로 나오라고 부르고는 근처 마을에서 다시 1박을 할 숙소를 찾았다. 하루를 더 벌게(?) 된 우리 일행은 밤하늘에 가득 수놓은 별을 쳐다보며 곡차 잔을 기울이고 어께동무하고 노래도 불렀다. 다시 대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동강 여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늘이 도운 행운과 행복, 보람이 가득한 2박 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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