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라면과 정치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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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라면과 정치의 공통점
  • 신희섭
  • 승인 2018.10.1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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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한국지정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라면. 참 대단한 음식이다. 간단히 먹을 수 있고 짧은 시간 안에 면과 국물을 동시에 먹을 수도 있다. 입이 느끼는 면발치기의 감동과 맵고 짠 국물까지. 그래서 라면은 인기가 많다.

세계인스턴트라면협회(WINA)에 따르면 한국인의 라면 소비는 압도적이다. 라면을 어느 나라가 가장 많이 먹는가의 대답은 당연히 중국(2012년 기준 440억 개)이다. 그러나 인구 수라는 기준을 뺀 1인당 라면 소비량으로는 중국이 한국을 따라오지 못한다. 2012년 기준으로 중국인들은 1인당 32.6개를 소비해서 8위에 그친 반면 한국은 71.9개로 거의 두 배 차이를 보인다. 2016년 기준으로 한국은 1인당 76개로 2위인 베트남의 52개와 3위인 인도네시아의 50개와도 큰 차이가 난다. 2012년 조사에서 인도네시아가 56.9개로 2위였고 베트남이 54.7개로 3위였던 것과 비교가 된다. 이들 국가는 순위도 바뀌었지만 라면 소비량이 준 반면 한국의 소비량은 오히려 늘어났다. 2012년 기준으로 전세계에서 1014억 개의 라면이 팔렸는데 한국에서만 35억 개를 먹었다. 라멘의 본산지로 알려진 일본이 54억 개로 1인당 42.5개를 먹는 것과도 비교가 된다. 물론 이 수치는 인스턴트 라면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한국인의 1년 76개는 5일에 하나씩 먹는다는 것을 넘는다. 수치상으로 한국인을 뛰어넘으려면 4일에 한 번꼴로 라면을 먹어야 이길 수 있다. 그것도 전 국민이.

이처럼 한국인들이 라면을 많이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역사적 요인을 들 수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쌀 생산량이 부족하고 정부의 혼분식 장려운동도 일조를 하면서 라면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한국에서 처음 인스턴트 라면이 만들어진 것이 1963년이다. 안도 모모후쿠라는 일본인이 1958년 처음 인스턴트라면을 개발하고 5년 뒤 한국에 도입된 것이다. 일본도 전후 식량이 부족하던 차에 만들어진 것이 라면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도 식량이 부족하던 차에 라면이 들어온 것이다. 여기에 혼분식 장려가 한 몫을 했다. 쌀 부족문제로 한국 정부는 1956년 미국이 잉여 농산물 원조를 할 때부터 혼분식을 장려했고 심지어 1967년부터 1976년에는 25% 잡곡을 섞어 먹으라는 행정명령도 내렸다. 1963년 들어온 라면은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것이다.

라면의 원조라고 불리는 생라면은 요코하마 부두의 화교 노동자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가난한 이들이 고향의 면 요리를 간단히 먹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감안하면 라면이라는 음식은 가난, 부족한 식량, 빨리 먹고 더 많은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절박함이 담겨있는 슬픈 음식이다.

지금도 라면은 슬픈 음식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아직도 라면이 서민들의 영양공급원이지만, 시간이 부족한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학원시간을 메워주는 동반자이며 초등학생들에게 면치기의 기초를 알려주는 입문교사의 역할도 한다. 게다가 산삼을 넣고 끓이거나 전복을 넣고 끓이는 ‘황제라면’이 있는 것을 보아서 ‘라면=가난’이 공식은 아니다.

역사적 요인이 희석된 지금 즉, 국민 소득 3만 불 시대고 식자재가 풍부해지고 노동 시간도 단축된 현 시점에도 라면이 인기가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역사적 맥락을 빼고 몇 가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첫째, 라면은 일관성이 있는 맛을 제공한다. 조리법대로 만들면 대체로 큰 차이가 없는 ‘먹어본 맛’을 낸다. 정치학적으로 말하면 기대를 안정적으로 반영해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제도적”이다. 둘째, 자신이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다. 시간 조절, 스프 먼저 넣기, 물의 양 등 다양한 변수를 통제해가며 자신의 레시피로 다른 맛의 라면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음식에 비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하기 좋다. 요리를 잘 못해도 라면 끓이기를 자신의 필살기라고 자랑하는 이들이 많은 까닭이다. 셋째, 평등성에 부합한다. 라면은 냄비에 끓이는 것이 맛있고 사발면은 플라스틱 사발 자체에 물을 부어서 먹는 것이 맛있다. 노동자나 고용자 모두 그렇다. 드라마에서 나오듯이 대궐 같은 저택을 가진 재벌 회장님도 냄비에 라면을 먹는다. 스테이크나 샐러드처럼 형편에 따라 우아함 수준이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라면은 계급 평등적이다. 넷째, 시간과 수고를 줄여준다. 가장 빨리 먹을 수 있고 배를 채우는 효과도 즉각적이다. 물론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다른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4가지 요인은 정치인의 생각과 공유되는 부분이 많다. 자신들은 일관된 맛을 낸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이 통제하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유혹. 자신이 만들어내는 정책이 대부분 계급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시간을 단축하고 수고를 덜어주고 있다는 확신.

잠시 라면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라면은 단순하지만 다양한 맛을 낸다. 하다못해 분식집에서도 때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다. 왜? 물 조절, 불의 세기, 그날의 기온 등등 수많은 변수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치는 더 다양한 맛을 낼 것이다. 기대처럼 잘 안될 수도 있고 준비한 것보다 후한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왜? 더 많은 기호를 가진 시민들, 외부환경의 변화, 내부 구성원들의 변화 등등 더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라면을 끓이는 이와 정치를 하는 이는 계속 유혹을 받는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강력한 유혹.

최근 한국의 보수 통합논의. 국제제재위반의 소지가 있는 상황에서 남북도로와 철도의 연결. 공화주의를 통한 새로운 정치 시도. 이러한 현상들은 통제할 수 있다는 강력한 유혹과 자신감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자주 먹는 라면이지만 물 조절이 쉽지 않은 것처럼 이러한 시도들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시민들의 보편적인 바람이지만 그래도 보고 있는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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