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국제규범 변천의 맥락에서 본 일본군 ‘위안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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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JUSTICE] 국제규범 변천의 맥락에서 본 일본군 ‘위안부’ 문제
  • 신희석
  • 승인 2018.08.1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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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석 박사
전환기정의워킹그룹

※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8월 14일은 ‘세계 위안부의 날’이라 불린다. 27년 전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힌 날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제대로 진상조사도 하지 않은 채 민간업자의 소행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1992년 1월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의 위안소 설치 관여를 입증하는 문서를 공개했다.

국내외 여론의 비판에 일본 정부는 사죄를 하면서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피해자 보상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는 국가간 조약을 통한 보상 문제 해결이라는 일본의 전후 정책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국제법상 중대한 인권침해를 단순히 조약 체결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국내법상 계약이든 국제법상 조약이든 당사자들이 신의에 입각하여 지킬 의무를 진다(pacta sunt servanda)는 원칙은 모든 법의 기초라 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 주권재민 원칙을 표방한 부르주아 혁명으로 국민이 선출한 입법부에서 제정한 법률이 중시되면서 국제법도 주권국가들이 합의한 조약과 관습법을 法源으로 강조하기 시작했다.

물론 시민혁명 이후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서 존재이유를 찾는다. 따라서 정부는 자국민에게 부당한 피해를 입힌 상대국 정부를 상대로 외교보호(diplomatic protection)를 행사하고 보상에 합의하면 이를 피해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 자본의 해외 진출을 촉진하기도 했다.

그런데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국가가 시장 실패를 교정하는 혼합 자본주의가 고전적 순수 자본주의를 대체했고, 제2차 세계대전의 총동원 체제는 계획경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개인의 재산권, 계약의 자유가 정부의 시장개입과 규제에 우선하기는 어려워졌다.
 

 

소련, 중국, 북한 등 공산 계획경제는 1960년대 초까지 급속한 공업화로 후발 개도국의 모델이 되었다. 특히 전후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아시아·아프리카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외국인 자산의 국유화와 경제 자립을 위한 산업화를 추진했다.

한국의 경우, 1945년 미군정 법령 제33호에 따라 당시 국내 자산의 85%를 차지하던 일제·일본인 자산이 적산(enemy property)으로 미군정에 귀속되었다가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로 이전되었다. 경제 개발도 정부가 앞장섰다.

이러한 흐름은 피해국 정부가 일괄보상 협정에 따라 가해국 정부로부터 받는 보상금을 처리할 재량을 강화했다. 즉, 피해국 정부는 피해자 개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보상금을 사용하기 쉬워진 것이다.

냉전 기간 서독은 서유럽 11개국과 나치 박해 피해자 보상협정을 체결한 반면에 동유럽 피해국들과 체결한 협정은 공산정권에 보상금의 처리를 맡겼다. 일본의 경우에도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16조에서 미진하지만 해외 자산을 처분하여 연합군 전쟁포로를 지원한 반면에 아시아 국가들은 개인 피해자를 위하여 보상금을 쓰는 데 소극적이었다.

1972년 모택동의 결정으로 중국은 1000억 달러에 이르던 대일 전쟁배상 청구를 포기하는 대신에 이후 수십 년간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개발 원조를 받았다. 박정희 정권이 1965년 청구권협정 자금의 대부분을 피해자 보상이 아닌 경제개발에 쓴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냉전 기간 분단국가로서 서유럽의 지지가 절실했던 서독보다 분단된 피해국인 한국이나 중국을 상대했던 일본이 협상에 유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유럽 피해국들처럼 아시아 피해국들에서 사유재산 보호, 민주적 정치참여가 제한되었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실정법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했다. 1930년대 이후 나치 독일은 유대인의 국적과 재산을 박탈하는 차별 법령을 제정했으며, 헤이그 육전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소련 등의 전쟁포로와 주민들을 학살했다.

1945년 유엔 출범 이후 보편적 인권규범의 발달로 인권 침해는 국내법과 무관하게 국제의무 위반이 되었다. 국가가 동의하면 개인이 인권조약 이행감독위원회에 개인진정을 하는 길도 열렸다. 유럽, 미주, 아프리카의 경우 지역 인권조약과 인권재판소가 생겼다.

강행규정인 최저임금법에 위배되는 고용계약이나 ‘신체포기 각서’가 무효이듯이 노예제, 포로학살, 제노사이드 금지와 같은 일반국제법의 강행규범과 충돌하는 조약도 무효라는 것이 1969년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 제53조에 명시되었다(jus cogens).

국내법 체계에서도 개인 권리 보호를 위한 법원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헌법재판소는 기본권 보호를 위해 국회가 제정한 민법의 동성동본 혼인금지 규정이나 형법의 간통죄 규정 등의 효력을 중지시켰다. 3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그런데 일본은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지난 70여 년간 일본의 최고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린 사건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일본은 또한 주요 인권조약을 비준했지만 조약이행감독위원회로의 개인진정은 허락하지 않고 있다.

2011년 8월 30일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과 원폭 피해자의 인권 구제를 위한 외교절차를 밟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부작위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은 여전히 관존민비 전통이 뿌리깊은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국제규범은 국가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의 전환기에 있다. 구유고 전범재판소 소장을 역임한 테오도르 메론(Theodor Meron) 교수는 이를 ‘국제법의 인간화(humanization)’라 부른 바 있다.

물론 국가 사이의 약속은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인신매매나 강제노동처럼 강행규범에 위배되는 전쟁범죄, 반인도범죄를 조약만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오늘날 국제사회의 법과 상식에 부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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