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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질리오라 칭게티의 “Non ho l'eta”와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
오시영  |  desk@l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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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10  11: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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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자연은 자연이어서 위대하다. 인위적 가공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 견고한 강물이다. 자연은 나비의 가냘픈 날갯짓 같지만 태풍이고, 무딘 것 같지만 바늘 같은 예리함이다. 입추(立秋)가 지났지만 더위는 여전히 기승이다. 누구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 더위 앞에서 모든 인간은 무력하다. 입추(立錐)의 더위이다. 하지만 이 더위도 곧 지나갈 것이다. 에어컨이 품귀이고, 고장 난 에어컨 수리가 더디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올 여름만큼 에어컨이 제 존재감을 드러낸 때가 언제 있었을까 싶다. 방학인데 뭐 하러 나오시느냐는 조교의 웃음 띤 말에 “더워서 갈 데가 없다.” 고 멋쩍어 하면서도, 하루 종일 연구실에 쳐 박혀 더위와 에어컨 사이를 오가며 땀을 흘리고 있다. 에어컨 바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많이 힘들면서도 더위 앞에 결국 무력하게 에어컨을 틀게 되고 만다. 하지만 땀 흘려 가며 책 속에 파묻혀 연구 논문을 뒤적이는 것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간혹 시작에 몰두하기도 하면서.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께서 지난 8일 담낭암 투병 중에 별세하셨다. 일흔 셋의 아직 아까운 연세에 운명하셨다. 수많은 시들에 대한 평론을 통해 격조 높은 문장과 철학 세계를 몸소 보여주셨던 분이어서 새삼 아쉽다. 더 이상 촌철살인의 품격 있는 글을 읽을 수 없게 되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선생께서는 유작이 되어 버린 “사소한 부탁”에서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 실패한다.”며 작은 것에 소홀한 삶을 살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셨다. 그러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물어왔다. 특히 먼 나라의 문학일 뿐인 프랑스 문학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늘 고뇌해왔다. 내가 나름대로 어떤 슬기를 얻게 됐다면 이 질문과 고뇌의 덕택일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문학의 힘은 약하지만 강하다. 총칼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총칼로 해결할 수 없는 고매한 가치를 실현한다. 선생은 자신의 서재, 지서재를 스스로 “감옥”이라 칭하며, “자신의 의지에 의해 선택한 길이지만, 갇혀 살아야 하고,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와야 하고, 또 늘 노역을 해야 되는 곳”이기 때문에, 자신의 서재야말로 자신을 가두어 두는 감옥일 수밖에 없다는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다. 서재에 꽃힌 책 중 3분의 2 정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며, 선현들의 길을 그들이 남긴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음도 우리에게 던지고 갔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통해 삶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지만, 또 다시 죽음이라는 영원한 감옥에 갇히는, 어딘가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수인인지도 모른다. 시평론을 통해 세상의 어둠을 밝히려 작은 촛불 하나 켜 들고 스스로를 경계하며 세상을 밝히려 하셨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밤이 선생이다”라는 첫 번째 산문집을 통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말고 사색하며 쉼을 통해 영혼을 고결하게 할 것을 깨닫게 되기를 소망했던 선생의 가르침은 진정한 선생을 찾는 수많은 밤길 후학 순례자들에게 밝은 등불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대는 어떤 감옥에 갇혀 있는가? 발버둥치고 있는가? 아니면 즐기고 있는가?

자연 속에서 자유로울 것 같지만, 자연에 놓여 있으면서도 폭염에 갇히고, 빗줄기에 갇히고, 모기 한 마리에 갇히고, 파리 한 마리에 휘둘리며 사는 수인의 존재가 바로 나약한 인간이다. 백세 세대라고 하지만, 최근 몇몇 가까운 선배 동료들의 예기치 않은 부고를 접할 때마다 젊어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의 죽음”이라는 심각한 명제에 붙들리는 시간이 종종 생겨나고는 한다. 오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는 시중의 말이 전혀 거짓이 아님이 느껴지는 순간들이다. 수인처럼 평생을 갇혀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나의 죽음의 최종 주인공이 되는 게, 그게 인간이 아닐까, 아니 모든 생명체의 결론이 아닐까 싶기조차 하다. 서재를 종종 살펴보면 수많은 시집과 법서들이 꽂혀 있음을 본다. 물론 종교서적이나 소설이나 잡지 등도 더러더러 보이지만, 가장 많은 종류는 역시 시집과 법서들이다. 두껍기로는 법서가 시집의 열배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한 권의 무게는 오히려 얇은 시집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수많은 시집의 제명(題名)을 훑어볼 때마다 한 시인의 삶의 무게가 저 짧은 제명에 농축되어 있음을 느끼며 시집의 제명이 시인의 제 명(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고, 부질없는 삶의 욕심을 줄이는데 인생의 무게를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소귀에 경 읽기 같은 말이 되고 말겠지만.

우연히 어린 시절 즐겨 들었던 칸초네 “Non ho l'eta”를 라디오에서 듣게 되었다. “나이가 어린데”라고 번안되어 알려진 “Non ho l'eta”는 질리오라 칭게티(Gigliora Cinquetti)가 16세 때인 1964년 산레모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던 노래이다. “Non ho l'eta, Non ho l'eta(저는 나이가 어려요)/per amarti, non ho I'età(아직 사랑할 나이가 아니랍니다)/per uscire sola conte(그대와 단 둘이 외출할 나이가 아니에요)/E non averei, non averei(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nulla da dirti perche tu sai(그대에게 이야기 할 게 없어요)/Molte piu cose dime(그대가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잖아요)/Lascia che io viva un amore romantico(달콤한 사랑을 하고 싶어요)/ nell attesa che venga quel giorno(그날이 오기를 기다릴께요)/ Ma ora no,(하지만 오늘은 안돼요)/ Se tu vorrai(만약 그대가 기다려 준다면)/ se tu vorrai aspettarmi(만약 그대가 나를 기다려 준다면)/ quel giorno avrrai(만약 그대가 저를 기다려 주신다면)/ tutto il mio amore per te(그날, 저의 모든 사랑을 그대에게 드리겠어요)”라는 가사로 되어 있는, 감미로운 노래이다.

학창시절, 휴대용 야외전축에서 LP판으로 수없이 들었던 노래이다. 당시에는 이태리어로 된 저 노래의 가사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감미로운 선율에 이끌려, 그녀의 신비로운 음색에 빠져 수없이 따라 불렀다. 최근 유튜브에서 16세의 그녀가 부르는 노래, 40대 중반의 그녀가 부르는 노래, 60대가 되어 부르는 노래를 각각 찾아 들으며, 세월의 흐름 속에서 맑고 청아했던 소녀 시절의 목소리가 호소력 있는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변해가는 음색의 변화를 느끼며, 더위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을 불렀을 저 노래 속에 그녀의 일생이 스며들어 있겠구나 싶기도 하다. 어린 시절 맑고 고운 목소리여서, 전 세계인의 심금을 맑고 곱게 감동시켰던 그녀의 목소리가, 이제는 70대 노년의 목소리로 어떤 감동을 울려줄까를 상상해 보는 것도 더위를 식히는 한 방법이리라. 젊었을 때의 매끈함이야 없겠지만, 세월의 생채기 속에서 여기 저기 주름이 지고, 상처가 덧입혀지며 낮고 낮은 겸손의 목소리가 되어 있지 않을까, 역시 가장 최근의 공연장에서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랬다. 낮았다. 오히려 울림이 더 컸다.

세상은 여전히 세속적이다. 기무사 계엄 내란죄 성립 여부가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그런데 수많은 국민들은 의외로 이런 국기문란행위에 대해 무관심하다, 정치인들은 그러한 현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체제의 사법부 크게 망침 수사가 그 촉수를 넓혀가고 있다(피해자들과 정의감에 불타는 이들만 이 일에 격분할 때 일반 국민들은 역시 별로 실감하고 있지 못하다, 그냥 더운 것 해결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일 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삼성 재벌에 두 손을 든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가 시중을 시끄럽게 달구고 있다. 인터넷 은행산업과 관련하여 은행과 산업자본의 분리정책, 즉 은산분리정책을 완화해 신규자금의 유입을 용이하게 해 주어야 한다고 정책을 전환한 것에 대해 많은 비판적 의견이 제시되지만 문재인 정부는 완화 쪽으로 정책을 선회하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아쉬운 면이 많다. 문재인 정부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다. 3년 반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이면 새로운 정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겁을 먹고 있다.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경제지표의 향상을 정책 선회를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 조급함에 결국 친시장 정책으로 선회하는 듯하지만, 이러한 정책 선회가 지지자들로부터 외면 받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노무현 정부는 지지자들이 원했던 초반 정책들이 반대세력의 저항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림에 따라 결국 양쪽 진영으로부터 모두 외면당함으로써 지지 세력이 사라지게 되어 이명박 정권의 탄생을 사실상 도운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에게 일관된 정부의 정책을 확고하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변함없는 기조로 추진할 것이라는 확고한 정책추진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좌고우면하지 않은 정부의 일관성을 보여주어야 함에도 벌써 우왕좌왕하기 시작한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운 것이다. 질리오라 칭게티(Gigliora Cinquetti)는 “Non ho l'eta”에서 말한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 당신을 사랑할 수 없고, 당신에게 줄 것이 없지만, 당신이 기다려준다면, 정말 기다려 준다면 자신이 성장한 후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런 그녀의 약속은 70이 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팬들은 지금도 16세의 그녀를 기억하듯 70세의 그녀를 기억하고, 그녀의 입에서 “Non ho l'eta”라는 첫 음절이 흘러나오면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래의 마지막에 가서 “quel giorno avrrai(만약 그대가 저를 기다려 주신다면)/ tutto il mio amore per te(그날, 저의 모든 사랑을 그대에게 드리겠어요)”라는 약속에 열광하는 것이다. 황현산 선생은 말한다, “고통 받는 사람들한테 공감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자존심이 필요하다고”. 어려운 일과 고통스러운 일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자존심이 필요한데, 그러한 것들은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와 시간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 것인지에서 오는 것이고, 결국 어떠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서 옳은 결정, 옳은 선택을 내려야 하는데, 그것은 용기와 긍지가 있을 때 내려지는 것이라고. 그것이 문학을 놓지 않아야 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지만 윤택했다며, 이러한 윤택함을 나누는 글을 쓰려고 노력했고, 그러한 노력이 모인 글이 “밤이 선생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어린 시절의 윤택함은 정이 많고 사랑이 많은 시골 사람들의 상호 우애와 돌봄과 협동과 품앗이에서 비롯된 여유로움,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선한 마음을 가진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에서만 맛볼 수 있는, 느낄 수 있는 자연이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덥다. 더 큰 것,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을 지향하며 많은 이들이 탐욕의 탑을 쌓을 때 질리오라 칭게티(Gigliora Cinquetti)는 지금도 “Non ho l'eta”라고 말하며 여전히 나이가 어린 소녀의 약속을 우리에게 노래하고 있고, 황현산은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공감하기 위해서 용기와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고, 그러한 것들은 문학 속에서 얻어질 수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밤이 선생이다’는 어두울 때 빛을 보라는 것이다. 밤하늘이 어두울 때 별빛이 빛나듯, 세상이 뜨거울 때 평소 가까이 하지 않던 얼음의 차가움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칠십의 질리오라 칭게티(Gigliora Cinquetti)의 “Non ho l'eta”는 십육세의 청아함에서는 멀리 떠나왔지만, 힘겹게 노래의 절정을 넘어가는 순간, 삶의 완숙함이 우리 모두의 삶의 흔적으로 다가와 감동스럽다.

입추도 지났으니, 이제 더위도 한 풀 꺾일 것이다. 에어컨을 오랜 시간 작동하다 보니 사람들이 전기료를 걱정하고 있다. 그런데 결론은 전기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고? 전기를 썼으니 내야 하는 것이다. 힘들게 사는 까닭이 더울 때 에어컨 켤 때 전기료 내기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기에. 그냥 내야 한다. 급부와 반대급부의 당연한 손뼉 침을 당연한 것으로 우리는 받아들이는데 아직 익숙하지 않다. 물론 누진제라는 이상한 제도를 고쳐야 할 필요성도 있지만. 며칠만 참자, 이까짓 더위도 가시지 않겠는가? 황현산 선생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며, 같은 시대를 살아주셨음에, 좋은 글로 가르침을 주셨음에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수십 년 좋은 노래를 들려 준 질리오라 칭게티(Gigliora Cinquetti)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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