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김원영 변호사 “법제도 발전한 만큼 정확히 내 삶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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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JUSTICE] 김원영 변호사 “법제도 발전한 만큼 정확히 내 삶도 확장했다”
  • 김주미 기자
  • 승인 2018.06.15 11:5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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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의 7월호에 실리는 글입니다 ※

김원영 변호사.
수시로 뼈가 부러지는 골형성부전증으로 인해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15세까지 방안에만 있던 그가 이제는 변호사이자 사회인으로서,
자신과 또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부단히 날갯짓하고 있다.
취재, 정리 김주미 기자

Q. 변호사로서 ‘장애학’ 연구를 하고 계신데요. 연구 분야에 대해 소개해 주신다면.

김원영(이하 ‘김’) : ‘장애학’은 여성학과 유사한 학제간 학문으로 아직 한국에서는 그다지 제도화된 학문은 아닙니다. 저는 법철학과 법사회학의 영역 안에서 장애를 연구하고 있어요. 제가 특히 관심을 가지는 분야는 정신적 장애인(발달장애와 정신장애)의 자율성과 자기정체성을 어떻게 인정하고, 법제도가 이를 지원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최근 장애인인권운동은 정신적 장애인들에게 ‘의사결정능력이 없다’거나 ‘부족하다’는 규범적 판단을 거부하고, 장애 그 자체를 특정한 정신적 특질로 이해하며, 이를 일종의 정체성(identity)으로 보는 시각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이는 전통적인 자유주의 법학의 전제들, 즉 합리적 의사결정이 가능한 권리주체라는 전제로 짜인 법체계와 모순을 일으키죠.
 

▲ 지난 5월 17일(목) 열린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주최의 '인권/성평등 교육의 날 강연'에서 강연 중인 김원영 변호사. 강연의 제목은 “장애와 질병을 가지고 살기 – 적극적으로 노련하지 않게"였다. / 사진 김주미 기자

Q. 법 전문가인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신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 제 목표는 일종의 ‘번역가’가 되는 것이었는데, 주위엔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가족, 친척, 주변 지인들 대부분이 법률이나 행정의 언어를 거의 알지 못하는,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으로 분류될 사람들이죠.

그런 지인들에게 저는 서울대를 다니는 ‘똑똑한’ 친구여서, 여러 어려움이 있을 때 그들은 제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사회학 이론을 공부한 제가 그러한 고민에 답해 주기에는 현실의 행정이나 법제도를 전혀 알지 못했죠.

당연히 법률가가 되어서 일정한 직업인으로서 스스로 경제적인 자립을 이뤄야겠다는 마음도 컸습니다. 사회학을 계속 공부하고 유학을 가고도 싶었지만, 로스쿨이 생기면서 고민 끝에 진로를 틀었습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컸습니다.

Q. 변호사가 되신 과정, 즉 로스쿨 입학 및 졸업까지의 과정을 회고해 주신다면.

: 로스쿨에 합격했을 때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1기로 입학했는데 1기에는 스토리가 분명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첫 오리엔테이션 때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앞에 나가서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로스쿨이 특정한 사회경제적 집단의 전유물이라는 비판이 있으니, 제가 이곳에 잘 적응하는지 여부가 로스쿨 성공의 척도가 될 수도 있다”고 호기롭게 동기들과 교수님들 앞에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학기가 시작되고 공부를 하면서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체력의 문제였습니다. 장시간 오래도록 집중하고 싶었지만 몸이 잘 따라주지 못했습니다.

다른 어려움은, 직업인으로서 법률가의 어떤 모델이 저에게 맞을지 잘 상상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로펌에서 일한다면, 휠체어를 타고 과연 일반적인 송무 업무를 잘 할 수 있을지, 고객들이 나를 어색해하면 어떨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 보면 장애인 변호사들이 다들 잘 해내고 있습니다. 괜한 걱정이었지만 당시에는 제가 참조할 모델이 거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나름의 질서가 잡혔습니다. 인권법학회를 만들자고 처음 제안했고 2대 학회장을 맡았는데, 그때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 활동의 자산이 되는 공부를 그때 많이 했습니다. 지금 활약하는 장애인 인권 관련 공익변호사들 중 여러 명이 당시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입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학부시절보다 훨씬 더 학교 환경도 좋아져서, 학교 생활 자체는 더 편안했습니다.

Q. 서울대 사회학과 학부생이던 시절, 장애인권연대사업팀의 활동을 통해 서울대학교의 많은 변화를 이끌어내셨습니다. 그 당시에 대한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 2003년 서울대에 입학했을 당시 저는 ‘장애’와는 무관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장애가 있지만 그저 평범한 학생으로 지내면서 고시를 보든 취업을 하든, 남들과 같은 진로를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 앞에서 옴짝달싹 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건물에 엘레베이터가 없었고 기숙사에서 혼자 빨래를 하지도 못하고, 매점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는 장애인 대학생들의 교육권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때였는데, 서울대에도 ‘장애인권연대사업팀’이라는 연대단위가 결성되었습니다.

처음엔 이 선배들을 피해 다니다가 결국 합류하게 됐습니다. 다양한 활동을 했죠. 학생들에게 서명도 받고, 강연회도 열고, 학교 본부 앞에서 집회를 하고, 총장과의 대화에도 참석했습니다. 언론이나 국회의원들을 적극 이용하기도 했는데, 조금씩 서울대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편의시설이 도입되고 청각장애학생들을 위한 문자통역 서비스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사회 장애인들에게 급격하게 확산되던 아이디어는, 장애가 개인의 몸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그 몸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로부터 온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그다지 혁신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시 우리에게는 엄청나게 새로운 생각이었습니다.

화장실에 가지 못하면 걷지 못하는 내 다리를 한심하게 바라봤는데, 이제는 그 화장실을 설치한 사람들의 공적 책임을 떠올리게 되었으니까요. 비유하자면,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까요(웃음).

그러한 생각을 마음에 품고, 스스로의 신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학교를 향해 발언했습니다. 학생들도 많이 동의해주었고, 총학생회 역시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 6월 15일 발간된 김원영 변호사의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사진제공 사계절 출판사

Q.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을 지내셨는데요. 장애 인권에 대한 우리 사회 전반의 의식은 어떤 수준이라고 보시는지. 가장 비장애인의 이해가 닿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 우리나라의 장애인 관련 법제도는 결코 후진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계속 보완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지만요. 하지만 특수학교 설립을 둘러싼 주민들의 반대나, 장애인들이 거주할 빌라 입주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일들을 볼 때 크게 좌절하게 됩니다.

물론 다른 나라라고 하여 장애를 가진 이웃을 언제나 환대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이처럼 ‘공개적’이고 노골적으로 반대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도대체 정당한 권한을 가지고 입주하려는 사람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그 이웃들이 막아서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며, 이것이 사회적인 논란이 되는 걸까요?

추상적인 존재로서의 장애인에게 한국사회는 관대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복지확대, 권리옹호 시스템 도입에 의회는 쉽게 반대표를 던지지 않습니다. 일부 고객들은 성소수자나 이민자들을 옹호하는 로펌은 싫어할 수도 있지만, 장애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로펌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상적’ 존재로서의 장애인에게는 관대하죠.

그러나 어떤 구체적인 장애인이 옆에 앉거나, 버스에 같이 타고, 옆집에 살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관념으로서의 장애가 아니라, 실제 살아있는 존재로서 장애인이 환대받는 사회로는 아직 이르지 못한 셈입니다. 후원금을 내지 않더라도 버스에 장애인이 함께 탔을 때 짜증을 내지 않는 사회, 그것이 우리 사회가 도달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Q.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나 장애인으로서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선언하셨어요. 변호사님의 솔직한 자아 고백을 듣고 싶은데요. 변호사님께 ‘삶’과 ‘장애’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 장애는 내다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제 삶의 일부입니다. 지금도 장애와 무관한 삶을 살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인공지능이나 드론 관련법을 연구하는 변호사라면 얼마나 재밌고, 또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될까요?(하하) 어딘가에 모임을 갈 때도, 장애가 있는 친구들끼리 모이면 여러모로 불편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결국 장애라는 이 속성을 정체성으로 공유하는 사람들 혹은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역사의 결과라는 점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제가 성장한 2000년대는 한국의 장애인운동이 가장 극적으로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법제도도 크게 발전했습니다. 그것이 발전하는 만큼 정확히 제 삶도 확장되었습니다. 이 명백한 사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장애라는 경험은 제 삶을 제약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저에게 고유성을 부여합니다. 일종의 소수언어를 쓰는 사람과 같다고 할까요?

저는 장애를 가진 저의 신체, 장애인으로서의 삶, 장애인 친구들과의 경험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삽니다. 이것을 소수언어에 빗댄다면 동시에, 법률가로서 또 연구자로서, 다소 부족하지만 주류적인 언어로 세계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편리하지 않고, 탁월한 성과를 내는데 제약도 있지만, 대체불가능한 저의 고유성은 바로 이 ‘이중언어 구사자’라는 정체성에서 옵니다. 그것이 주는 삶의 장점은 결코 무시할 정도는 아닙니다.

Q. 학창시절과 학부시절, 배우로서 무대에 오른 경험이 있으신데요. 무대를 사랑하시는 이유, 그리고 연기와 관련하여 앞으로의 계획 등이 있으신지 듣고 싶습니다.

: 저는 늘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공공장소에 나오면 주변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그 눈빛이 익숙했어요. 그런데 중학교 때 교회 행사를 계기로 작은 연극무대에 올랐는데, 사람들이 저를 바라볼 때 이질적인 존재라서가 아니라, 공연에 등장한 한 인물로서 바라보는 그 시선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 이후로 ‘어차피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 한다면, 주체적으로 기획한 무대 위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꿈을 대학시절에도 계속 가지고 있다가, 공연을 직접 만들고 배우로서 무대에 오르기도 했어요. 연기와 관련해서 거창한 계획까지는 없지만, 장애를 가진 제 몸을 그대로 사용한 행위예술을 만들고, 공연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마 조만간 공연을 올리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 2014년 '테레즈라캥' 공연 중, 열연하고 있는 김원영 변호사 / 사진제공 김원영 변호사

Q. 화제가 됐던 저서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에 이어 최근 책을 한 권 더 출간하셨습니다. <실격 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라는 책인데요. 이 책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혔으면 하시는지, 출간 의도와 내용의 개략적인 소개를 해주시겠어요?

: 어쩐지 제 인생에서 한번은 이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애나 질병, 혹은 아름답지 않은 외모 등을 이유로 사적, 공적 영역에서 배제당하고, 품격이 없다고 취급되는 사람들의 존엄과 매력을 입증해 보이는 일입니다.

헌법이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인간존엄을 당연히 규정하지만 사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각자를 존엄한 존재로 여길 수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권력과 재산이 있고 아름다운 사람들은 대체로 존중받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 관해 말해서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존엄이 어떤 모습을 띄는지 명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실격된’ 사람들이 어떻게 존중받지 못하고, 또 반대로 존중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일상에서의 상호작용에서 출발해서, 법과 제도, 사랑과 예술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모든 사람들의 존엄과 매력의 가능성을 보이고자 했습니다.

사실, 제목은 ‘변론’이라는 일종의 논증적 말하기를 암시하고 있지만, (그런 식의 글쓰기이기는 합니다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종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생각합니다. 추상적으로만 생각되는 장애인, 만성질환자, 여러 이유에서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소수자들이 가진 삶의 가능성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사례들을 많이 동원했습니다.

장애아의 출산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잘못된 삶 소송(‘wrongful life case’),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해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를 의도적으로 출산하는 데프초이스(Deaf choice), 장애가 있는 신체에 성욕을 느끼는(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결국 혐오와 연결되는) 디보티즘(devoteesm), 정신건강복지법에 따른 강제입원 제도 하에서 정신장애인의 자율성 문제 등이 그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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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도입취지 2018-06-15 16:07:04
저분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저분도 사법시험으로도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이 사례는 로스쿨의 도입취지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사실, 로스쿨의 도입 취지는 판검사가 결국 모두 변호사가 되는, 한마디로 법조계는 모두 한통속인 사법시험의 구조를 변혁시키기 위한 것이다.
원하는 모두가 로스쿨에 들어가서 변호사가 된다면 볼멘소리가 나올 이유는 없다.
결론은 로스쿨의 도입취지는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속이는 말이다.
로스쿨의 도입취지 들먹거리는거 진짜 지겹다.

로스쿨 2018-06-15 15:27:12
이게 바로 로스쿨 도입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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