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변호사 김지영의 책 속을 거닐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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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JUSTICE] 변호사 김지영의 책 속을 거닐다 (2)
  • 김지영
  • 승인 2018.06.0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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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변호사
서울지방변호사회, 한국여성변호사회 이사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김용규 / 웅진지식하우스 / 2016

한낮의 어둠

요즘 지방선거운동이 한창입니다. 사실 국민들은 지방선거에 누가 나오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우리나라만큼 높은 곳도 없지요. 이제 정치인들에 대한 시선은 불신을 넘어 조롱에 가까워졌습니다.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는 2005년 9~10월호 기사에서 “오늘은 있지만 내일은 없는 것”들 가운데 첫 번째로 정당을 꼽았고, 어떤 미래학자는 2020년대 국회의원들이 멸종동물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고 하네요(p34). 이런 예측들을 보면 통쾌하기도 하고 그런 미래가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사회계약론>에서 주권이 양도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권은 대표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뜻이 어쩌구 저쩌구”하며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포장할 때 저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들은 국민을 대표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말하는 ‘국민’은 누구인가요? 나의 뜻도, 광화문광장에 모인 국민의 뜻도, SNS를 통해 표출되는 민심도 저들이 말하는 ‘국민’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국민’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루소는 “영국인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출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버린다(p34).”라고 말하였습니다. 선거철만 되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그들. 그들이 자신을 뽑아달라고 애걸하는 그 기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개돼지’로 돌아갑니다.

나는 정치인들에게(더 넓게는 소수의 지배층에게) 왜 ‘개돼지’가 되었을까요? 이 책의 저자는 그 원인을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스타벅스의 다윗을 두려워하랴.” SNS상에서, 또는 스타벅스나 광장에 모여 비판을 하는 것만으로는 어떤 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Wall street나 이들의 로비에 굴복한 정치인들을 향해 성난 시민들이 “Occupy Wall street”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무엇이 달라졌나요? 이 책의 저자는 말합니다. “비판적 좌파가 권력자들에게 약간의 때를 묻히는 데 성공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떤 골리앗도 공원에서 시위하고 돌아서서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젊었지, 아름다운 날이었지’라고 회상하는 다윗들에게 자기 목을 내주지 않으며, 어떤 황소도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자신이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고 있다고 자위하는 다윗들 호주머니 터는 것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p40).”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독재정치를 비판하였습니다. 종이신문과 TV방송마저 장악되었던 그 시절에도 민심은 천심인지라 진실을 아는 국민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국민이었지만, 단지 비판하는 것 외에는 저항할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세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고 늘 비판만 하던 아버지는 가난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지요. “비판만 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며, 내 인생을 좀먹는 것이다. 해결책을 찾자.”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사회의 문제는 “necessita"이며, 뛰어난 지도자는 ”virtu"와 “prudenzia"를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저는 사회의 문제들을 단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그 해결책이 반드시 있는 ”necessita"측면에서 바라보려고 합니다.

권력을 쟁취,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소수의 권력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친구들 간에 발생했던 불행한 에피소드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60대에 들어섰고, 유명대학을 나와 사회에서 일정한 부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술잔을 기울이다, 박근혜 전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친구 A가 ‘박근혜 전대통령에게 문제가 있었으며 그런 자가 탄핵된 것은 잘된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반공, 수구이데올로기에 세뇌된 친구 B가 이에 격분하여 술이 든 유리잔을 친구 A의 얼굴에 던졌다고 합니다. A는 큰 부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친구인 B를 고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스스로 놀란 B도 충격을 받았으며, 친구들도 B 만나기를 꺼려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B를 그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을까요.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동굴의 비유’를 말하였는데, 동굴에만 갇혀 벽만 바라보고 살아온 죄수들은 벽에 비친 실재의 그림자를 실재라고 여깁니다. 이 죄수들 중 한 명이 동굴을 벗어나 진짜 사물과 그림자를 만드는 태양을 보고 자신이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시 동굴로 들어가 죄수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말하지만, 오히려 죄수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여깁니다. 이러한 실재의 왜곡 중 하나가 이데올로기이며, 이데올로기는 소수의 권력자가 대중을 지배하기 위해 역사와 현실을 왜곡하여 만든 허위 사상입니다. B는 이데올로기라는 동굴에 갇힌 죄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인은 감히 진리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광인은 다만 진리를 안다고 말하는 법입니다(p353).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에서 윌리엄 수도사는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이런 게 바로 악마야”라고 말하였습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말하는 악마가 바로 자신만이 진리를 안다고 말하는 광인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이런 광인들이 권력을 쥐게 되었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 역사를 통해 수없이 보았습니다.

이런 광인들의 이데올로기,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한, 우리는 한낮에도 태양을 보지 못하는 어둠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한낮의 어둠>은 한때 공산당원이었던 아서 쾨슬러가 주인공 루바쇼프를 통해 우리가 갇혀 있는 허위 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우리 역시 루바쇼프처럼 자본주의, 민주주의 본질을 알지 못한 채 “한낮의 어둠”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한낮의 어둠”속에 앉아 비판만 하지 말고, 이제는 “동굴”에서 나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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