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전문의 박성근의 마음이야기- 판결과 진단은 회복의 시작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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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JUSTICE] 전문의 박성근의 마음이야기- 판결과 진단은 회복의 시작일 뿐
  • 박성근
  • 승인 2018.05.14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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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근
아산정신병원 정신과장

한 특목고 학생과 면담을 했다. 보통 학교에서 주는 우울증 검사지에는 어떻게 답을 해야 정상으로 분류되어 본인이 불려가지도 않고 부모님께 연락이 가지도 않는지 다 알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솔직하게 힘든 것을 기록했더니 사태가 커져서 결국 병원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죽을 힘을 다해 공부했지만, 고등학교 들어가서 친 첫 시험에서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원래 가졌던 꿈을 포기해야 하나’ 걱정을 하면서 자해를 했고, 이미 중3 때부터 팔에 피가 나도록 긋는 자해를 하며 외고 입시를 준비한 학생이었다. 학생은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께 칭찬을 들은 기억은 없고 항상 혼나거나 맞은 기억, 특히 목표로 했던 점수보다 한두 개 정도 더 틀렸다는 이유로 맞은 경험들이 가득하다’는 말을 하면서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겉으로는 웃으며 지냈어도 학생은 늘 울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좀 더 자세한 검사를 하여 부모님이 아이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함께 오신 아버님을 뵈려 했는데, 아버님도 상담 선생님과 잠깐 상담을 하고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매우 우울하다고 나왔다. 아예 학생과 아버지 모두 초진 환자로 등록해 놓고,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아버지의 우울함이 더 깊고 심각하고 오래됐다는 것을 느꼈고, 아버지가 학생과 거의 똑같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아버님도 우셨다. 학생은 아버지에게 혼난 기억으로만 가득했는데, 아버지는 아이가 이만큼 자라준 것만 해도 너무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아이에게 표현을 제대로 하신 적은 없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직장 일이 갈수록 늘기만 하고 ‘이러다가 과로사나 과로 자살로 곧 죽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안은 채 수십 년째 다니는 중견 기업에 매일 출근하고 있었다. 속이 콱 막히고 그 막힌 것이 머리까지 올라오는 느낌을 받는다고도 하셨다.

약을 기대하시는 아버지께 학생의 심리검사 시행과 검사 설명 때까지 드실 약을 소량 챙겨 드렸다. 어쩌면 아버지보다 아직은 덜 힘들 가능성이 큰 학생에게는 ‘검사 결과를 본 후 다양한 방법으로 나아질 것을 의논하자’고 말했다. 다시는 자해를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면서... 학생의 어머니는 일 때문에 못 오셨다.

이게 어쩌면 맞벌이 부부이고, 중산층이고, 외둥이를 키우고 있는 우리나라 가족의 전형적인 정신적 건강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학생과 거의 흡사했던 내 지난 시절이 떠올라 더 마음이 아팠고, 부모님의 사정을 들으면서 또 마음이 아팠다.

정신과는, 진단이 너무나 쉽다면 쉬운 과이고, 약도 몇 종류 없는 과에 속한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딱 맞는 이해를 시켜주면서 소통과 공감을 하고, 정말 건강해질 때까지 도움을 주는 것, 그 긴 치료의 과정과 재발까지 막는 과정을 지나는 것은 어떤 과 못지않게 어렵다. 정신적으로 이미 완전히 지쳐있거나 이미 병들어 있는 사람들이기에 더 그렇다.

이런 부모와 자녀의 어려움을 서로 이해하게 돕고, 작은 말투나 표정 하나에서라도 서로 덜 상처를 주고받도록, 또 그들이 한 편이 되도록 돕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대부분 참 어렵고, 좋아지는 데만도 몇 년 이상이 필요하고, 과도하게 무리해서 잘하려다가 포기해 버릴 위험이 있어 천천히 노력하도록 부탁해야 할 때도 있다. 그 과정에서 종종 약도 필요하다.

이들의 검사는 아마 잘 진행될 것이지만 둘 다 많이 우울하고 불안정하게 나올 것이 예상된다. 자녀가 부모의 소유가 아니듯, 부모 역시 자녀들의 통장이 아닌데, 진짜 서로 나눠야 할 대화나 깊은 관계는 여러 이유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겉으로 남은 다양한 형태의 기억과 현실 속에서 서로 상처만 주고 있다. 진짜 서로 하고 싶은 말은 못하고 있는 상황이 태반인 경우가 많다.

판사의 판결이 어쩌면 나 같은 정신과 의사에게는 진단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판결과 진단은 아무리 정확하고 이의가 없어도 회복의 시작일 뿐 끝이 아니기에, 앞으로의 회복 과정, 그 긴 시간이 더 중요하고 걱정이 된다. 내가 이들과 함께 잘 걸어가 줄 수 있을까? 이 부녀를 보면서 계속 그 생각이, 아니 그 걱정이 들었다. 부디 더디더라도 꾸준히 나아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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