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국제정세와 한국이 나아갈 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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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JUSTICE] 국제정세와 한국이 나아갈 길 (1)
  • 신희석
  • 승인 2018.04.29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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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석 박사
전환기정의 워킹그룹(TJWG) 연구원
연세대 법학 박사(Ph.D.)
하버드법대 법학석사(LL.M.)

※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외교와 인권, 그리고 국제법

1954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역사적인 브라운 결정에서 공립학교의 인종분리를 위헌이라 판결했다. 그런데 애치슨 국무부장관은 앞서 연방정부가 대법원에 제출한 참고인 의견서(amicus curiae)에서 위헌 결정을 촉구했다.

미국의 외교 수장이 왜 미국 법정에서 미국 공립학교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했을까? 때는 냉전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1949년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중국의 공산화에 이어 1950년 한국전이 발발했다. 전장뿐만 아니라 유엔 총회를 무대로 한 외교전도 달아올랐다. 남북한이 수십 년간 물밑에서 불꽃 튀는 외교전을 벌일 바로 그 무대이다.

그런데 1국 1표인 유엔 총회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의 수가 늘고 있었다. 서구 식민통치 하의 인구는 1948년 7.5억 명에서 20년 후 4000만 명으로 줄었다. 절대 다수인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은 서방도 공산 진영도 아닌 제3세계 비동맹권을 표방했다.

이제 갓 백인들의 착취와 천대에서 벗어난 이들 나라의 눈에 비친 미국의 인종문제는 가관이었다. 남부에서는 선거법이 흑인들의 투표권을 교묘히 박탈했고, 건방지거나 백인 여성을 꼬신다는 이유로 군복 입은 흑인 장병들조차 린칭을 당했다. 워싱턴 일대의 식당들은 아프리카 출신 외교관들을 문전박대했다. 많은 주에서 인종간 혼인은 범죄로 다스렸다.

1865년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연방헌법을 개정하여 노예제를 금지하고, 법의 평등한 보호를 보장했다. 노예제 폐지는 당시의 세계적 흐름으로 관련 조약들이 체결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남부 반군을 지원하려다가 국내 여론의 반발로 이를 포기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남부 주정부를 장악한 백인들은 해방된 흑인들을 사람 취급하기를 거부했다. 학교, 식당, 버스, 기차칸은 인종에 따라 분리되었다. 1896년 대법원은 악명높은 플레시 사건에서 “분리하되 평등”이라며 합헌 판결을 내렸지만 실상은 평등과 거리가 멀었다.

1945년 유엔 창설 이후에도 미국 정부는 처음에는 인권문제로 남부 백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애썼다. 미국은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의 법적 효력을 미리부터 부정했고, 제7조에는 플레시 결정의 “분리하되 평등” 해석으로 불구가 된 미국 헌법의 “법의 평등한 보호”라는 문구를 삽입시켰다.

제3세계 국가들은 미국 외교관들의 말장난에 놀아나지 않았다. 게다가 소련은 미국의 공산독재 비판에 역으로 미국의 인종차별을 선전하며 구애 작전에 나섰다. 유엔 총회는 유엔 헌장과 세계인권선언을 인용하여 미국의 우방이던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 비난을 결의했다.

결국 소련과의 건곤일척 중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의 정가·외교가는 국가안보를 내세워 대법원에 인종차별철폐를 촉구하기에 이른다. 물론 브라운 판결은 미국 냉전 외교의 고충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지만 이 분야 연구의 권위자인 더드지아크(Dudziak) 교수가 지적하듯이 그러한 언급이 있었다면 오히려 판결의 감동은 반감했을 것이다.

이후로도 미국의 흑인민권운동과 남부 백인들의 탄압에는 국내외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결국 존슨 대통령은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의 의회 통과와 동시에 유엔 총회에서 1965년 인종차별철폐협약, 1966년 국제인권규약 채택을 주도하며 분위기 반전에 나섰다.

그럼에도 미국의 권위는 베트남전으로 다시 추락했다. 그러자 카터 대통령은 “인권 외교”라는 묘수로 미국 리더십의 회복에 나섰다. 1980년 미국 법원은 카터 행정부의 참고인 의견서를 받아들여 국제법을 위반한 해외 인권침해에 대한 민사관할권을 인정한 필라르티가(Filártiga) 판결을 내렸다.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이라크전에서 보듯이 미국조차 힘만으로 세계를 경영할 수는 없으며, 미국 주도 정치경제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여론의 반발에도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를 선언하고, 독재자들과 스스럼없이 만나는 행태에 미국 내에서도 비판이 잇따르는 이유이다.

한국의 인권 논의도 단순히 국내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외교와 국제법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한 세계 11위 경제대국으로서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 것일까? 정부뿐만 아니라 법원도 국제법의 적극적 해석, 적용으로 보편적 인권과 한국에 유리한 국제규범, 국제여론을 증진할 기회를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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