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변호사 김지영의 ‘책 속을 거닐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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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JUSTICE] 변호사 김지영의 ‘책 속을 거닐다’ (1)
  • 김지영
  • 승인 2018.04.29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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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변호사
서울지방변호사회, 한국여성변호사회 이사

※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삶이 아닌 것들, 버린다!
- <불멸의 문장>이 던진 한 마디

긴 겨울을 지나와서 일까, 아니면 세상사가 어지러워서 일까. 마음이 몹시 무겁고 우울하네요.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들, 권력과 명예를 향해 날아오르지만 결국 추락하는 정치인들, 성실히 참되게 살지만 자신들의 인생을 무엇인가에게 저당 잡힌 채 채찍질 당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

저는 늘 아등바등 조급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희생하며 달려 왔지만, 제가 올라가고 있는 것인지, 내려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상처받은 저의 어깨를 두드리듯, 위로를 건넨 책 한 권이 있습니다. <불멸의 문장>

이 책에는 64편 고전의 간략한 스토리와 감동적인 문장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문장들이 저의 경험들과 결부되면서 울림을 주었습니다. 거센 폭풍우 속에 있던 제 마음이 잔잔해졌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고전들은 제가 20대 초반에 읽었던 책들도 다수 있는데, 그 때는 전혀 알 수 없었던 단 맛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이 책을 읽던 내내 고개를 끄덕이고 위로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지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한 40대 중반의 판사가 사망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의 동료들은 이반의 죽음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승진에 어떤 영향을 끼칠 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이반의 부인은 남편의 죽음으로 보험료를 얼마나 뜯어낼 수 있을 지 궁금합니다. 주인공 이반은 일명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판사로서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렸지만, 그의 죽음은 가족, 동료들의 삶에 어떤 이득을 가져다 줄 지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죠.

이 이야기는 제가 사법연수원 다니던 시절 겪었던 일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연수원 2년차 때 우리는 성적을 평정하기 위한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연수원생들은 치열하게 시험에 매달렸었습니다. 이미 변호사를 하기로 결심하여 그 시험에 별 관심이 없었던 저조차도 얼굴이 시꺼멓게 변할 정도로 힘든 시험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한 여자 연수생이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돌연사라고 하였지요. 연수원 대강당 앞에 향초가 피워지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분향시설도 마련되었습니다. 제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 앞을 지나던 연수생 2명의 대화 내용이었습니다. “경쟁자 하나가 없어진 건가? ㅋㅋㅋ”, “여자가 얼마나 독했으면 저렇게 됐겠어.” 그녀를 위한 작은 애도조차도 사라진 그 잔인한 말들. 과연 이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이 다를 수 있을까요.

“왜 우리는 이렇게 쫓기듯이 인생을 낭비해가며 살아야 하는가?” 누구나 한 번쯤 되뇌어 보았을 말.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월든>에서 같은 물음을 적어 놓습니다. 이 물음에 사뮈엘 베케트는 대답합니다.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그건 고도(Godot)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이 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고도’가 무엇인지, ‘고도’가 오기는 하는 것인지 그 주인공도 모릅니다. ’고도‘는 불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끝없이 ’고도‘를 기다리며 인생을 낭비하고 초조하게 살아가는 건 아닐까요. 밀랍 날개를 한껏 펴며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다 추락하는 이카로스들. 그들에게 ’고도‘는 욕망의 성취였고,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며 인생을 쫓기듯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의 성취 이후에 다가오는 불행, 몰락. 또 다른 ’고도‘가 다가온 것입니다. 이카로스들에 휩쓸려 날개짓을 하던 저도 다르지 않겠지요.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 윌리 로먼의 큰 아들 비프는 사업 좀 해보겠다며 예전 회사의 사장을 찾아갔다가 허탕만 치고, 만년필 한 자루를 훔쳐 나옵니다. 도망쳐 나온 그는 문득 파란 하늘을 올려다 봅니다. “뭐 하려고 이 빌어먹을 놈의 물건을 쥐고 있는 거야? 왜 원하지도 않는 존재가 되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거지. 왜 여기 사무실에서 무시당하고 애걸해가며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거냐고? 내가 원하는 건 저 밖으로 나가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그때를 기다리는 건데.” 우리가 지금 손에 쥔 빌어먹을 물건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정녕 우리가 원하는 것이던가요?

11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불특정한 사람을 겨냥해 아파트에서 물건을 투척하는 범죄가 뉴스에서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같은 사건이 제게도 일어났었지요. 한 아파트 앞을 지나가는 데, 정말 바로 눈앞에서 10kg은 족히 되어 보이는 나무 등걸(집안 장식용으로 쓰인 듯 잘 다듬어졌고 니스까지 칠한 물건이었음)이 떨어졌습니다. 분명히 누군가가 나를 겨냥해 던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제가 0.1초만 빨리 나아갔다면 저의 머리는 박살이 났을 것입니다. <몰타의 매(The Maltese Falcon)> 주인공 찰스도 공사장 앞을 지나다가 철제빔이 떨어져 가벼운 상처를 입는데요. 죽음의 찰나에서 살짝 빗겨간 삶, “누군가 인생의 어두운 문을 열고 그 안을 보여준 것 같았다”라고 찰스는 말합니다. 유사한 경험을 했던 저는 이 스토리를 읽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인 것. <불멸의 문장> 작가는 “죽음이란 마구잡이로 찾아오는 것이며, 사람은 눈 먼 운명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평범한 일상을 즐길 수 있다.”고 서술하는데, 정말 그러하지 않은가요.

이제 바람에서도 봄의 향기가 느껴지고, 자연은 한바탕 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헛되이 ‘고도’를 기다리지 말고, 눈 먼 운명이 우리에게 허락한 이 일상을 즐겨 봅시다. 마지막으로 제 마음에 전율을 안겨 주었던 문장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산다는 것은 그토록 소중한 것이다.”- <월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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