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업 변호사의 법과 정치(58)- 퇴장미학(退場美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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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업 변호사의 법과 정치(58)- 퇴장미학(退場美學)
  • 강신업
  • 승인 2018.04.2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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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업 변호사, 정치평론가

나아감에 때가 있다면 물러남에도 때가 있다. 사람은 대개 나아가긴 좋아하지만 물러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론 자존심과 위엄을 잃지 않고 점잖게 물러나는 법을 배워야한다. 물러나야 할 때는 집착하지 말고 스스로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론 안타깝고 가슴 아프더라도 헛되이 애쓰지 말고 깨끗하게 단념해야 한다. 스스로 때를 선택하는 건 현명한 것이고 남이 등 떠밀지 않더라도 결단을 내리는 것은 분별 있는 것이다.

홀가분하게 마음을 접고 냉정하게 떠나는 것은 때론 치욕이 될 수 있는 극한상황을 이기는 것이다. 물러나는 것은 최악의 사태를 예방한다는 의미이고 때를 기다려 기회를 얻는다는 의미다. 우린 이순신 장군에게서 그런 예를 본다. 이순신은 온갖 수모를 겪으며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때를 기다려 자신과 나라를 구했다. 1597년(선조 30년) 1월 이순신은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월 1일 백의종군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가벼이 행동하지 않고 온갖 수모와 불명예 속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 끝내 승리하고 영웅적으로 퇴장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1732 ~1799)은 정치인이 무대에서 어떻게 퇴장해야 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다시 대통령에 출마해 달라는 주위사람들의 말을 물리치고 임기가 6개월 남은 1796년 9월 17일 더 이상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재선은 수락했으나 3선은 파멸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왕이 되어달라는 국민의 성원이 있었을 때에도 그는 과감하게 욕심을 접었었다. 1797년 3월 4일 워싱턴은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왔다. 초대 대통령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른 평화로운 정권교체였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미국이 민주주의를 꽃피우며 세계 최고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만약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욕심을 부리다 대통령제가 실패했더라면 미국은 아마도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거나 군주가 다스리는 왕정국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조지 워싱턴과 같은 지도자 대신 물러나지 않으려고 영구 집권을 획책하다 국민에 의해 쫓겨난 초대 대통령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한 우리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조지 워싱턴의 위대한 전례를 따르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쉽다. 첫 단추를 잘못 꾀어서인지 우리 정치엔 스스로 정점에서 퇴장하는 관행이 생겨나지 못했는데 이 점 역시 몹시 아쉬운 부분이다. 정치는 도박보다도 중독성이 강하다고 하니 정치를 떠나는 것이 쉽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한 번 정치인 노릇했다고 해서 계속해서 정치인으로 살라는 법은 없다. 세상엔 정치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일도 많다.

최근 미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꼽혀온 마흔여덟 살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이번 임기를 끝으로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청소년기에 있는 세 아이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는 것이 퇴장의 이유다. “제가 연임한다면 세 아이는 나를 ‘주말 아빠’로만 기억할 겁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겠습니다.” 그는 3년 전 하원의장 제의를 받았을 때도 “가족과의 시간만은 포기하지 않겠다”며 사양했었다. 그는 의장이 된 뒤에도 주말이면 비행기로 3시간도 더 걸리는 위스콘신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는 퇴계 이황이 물러남의 철학을 잘 보여주었다. 그는 조정에서 79번을 불렀으나 겨우 11번 응했다. 선조 때 예조판서를 제수 받았을 때도 ‘재주가 미치지 못하고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끝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학문을 좋아하는 기질 때문이었다고는 하나 어쩌면 고향에서 가족들과 자연을 벗하며 사는 삶이 더 가치 있다고 여긴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이제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며, 고향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며 정계를 떠나는 정치인들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이런 저런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떠들어대는 정치인들은 제발이지 그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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