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람의, 사람에 의한, 그러나 사람을 위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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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람의, 사람에 의한, 그러나 사람을 위한 법
  • 송기춘
  • 승인 2018.03.30 16:4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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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춘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예비 법률가들에게 드리는 글 -

2005년 초에 퇴임한 어느 법률가는 이렇게 말했다. “헌법재판소 결정은 지고지선의 결정”이며, 이를 비판하는 정치권과 시민단체 사람들은 “지각없는 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2004년 10월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대해 위헌결정을 선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이었다. 다른 한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병역법 제88조 제1항 제1호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사건(2004년)의 별개의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율곡 이이가 외적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임진왜란의 발발 10년 전인 1583년에 10만 양병을 주장한 것은 율곡이 양심이 없었거나 호전적이었기 때문은 아니었고 오늘날 국민개병의 기치 아래 많은 청년이 군에 입대하여 희생을 견디며 집총을 하는 것도 그들이 양심이 없거나 호전적이어서 그러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 문장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나 싶지만, 그건 아니다. ‘(양심적) 병역거부하면 양심적이고, (병역거부 안 하고) 군대 가면 비양심적이냐’ 하는 항간의 거칠고 비논리적인 소리를 우아한 문장으로 다듬은 것뿐이다. 그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얘기한다. 이들은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의심스러운’ 자들이라고. 과연 그러한가?

미국 일리노이주의 어느 여성이 변호사등록신청을 했으나 거부되어 다툰 소송(1872년)에서 연방대법원의 어느 대법관은 이렇게 말했다. “여성은 자신의 머리이자 대표인 남편으로부터 독립된 법적 존재가 아니다.” 그런가 하면 흑백차별이 여전히 극심하던 시절에 미국연방대법원 판결(1896년)에서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도 있었다. “우리 헌법은 피부색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관심하며(color-blind), 시민들 사이에 신분이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 된다고 한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어떤 생각은 낡아빠진 게 되었고, 어떤 것은 보편적이 되었다.

법률가가 되기 위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은 헌법이나 법률의 조문과 판례를 소중하게 다룬다.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듯이 판례라는 것이 충실한 법률의 해석의 결과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법관이나 재판관이 자신의 인식의 한계와 세계를 바라보는 각도와 폭 안에서 만든 것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법관 자신이 자유로울 수 없는 이해관계에 관련되어 있을 때나 스스로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사건에 대한 판단에서는 그런 측면이 두드러진다. 심지어 법률도 이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법률은 수많은 이해관계의 갈등과 충돌 속에서 조정과 타협의 결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률이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주는 정의의 실현으로 얘기되지만, 실상은 ‘지금’ ‘여기’에서의 ‘다수’의 뜻과 이해를 법률의 형식으로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률이나 그 해석과 적용이 모두 그것을 만들고 움직이는 사람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이게 현실의 법이다.

그럼에도 법과 법해석을 지고지선이라 한다거나 이에 대한 비판을 몰지각하다고 한다거나 자신의 편견을 보편적인 것처럼 여기는 태도는 법을 물신(物神)화하는 것이다. 본래 물신을 숭배하도록 하는 것은 지배자가 원하는 바이다. 법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해석·적용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회 구성원 다수 또는 대표의 다수의 동의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니 그것이 효력을 가지는 동안은 그대로 집행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만들어질 때의 동의가 가지는 한계나 해석하고 적용하는 이들이 가지는 또는 가질 수 있는 문제점에 무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법률과 판례를 공부할 때, 그것의 내용을 충실하게 이해하려 해야 하겠지만, 항상 그것이 가지는 한계에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판례 역시 해석자의 인식의 한계 또는 오류까지 담고 있을 수 있으므로, 그저 있는 그대로 판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헌법재판소 주요 판례도 문제점이 지적되지 않는 것이 드물다.

법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법을 공부할 때 그 법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연상하는 것도 좋고 필요한 일이다. 특히나 그 법 속에서 사람이 겪을 아픔을 느끼고 그걸 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할 필요도 있다. 분노도 느낄 일이다. 법적 논리는 머리에서보다는 가슴에서 나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부방법은 어떨까? 어떤 법 또는 조문을 공부하면서 항상 그 조항이 우리 사회의 가난한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노동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법을 조금 더 넓게, 또 사람을 위한 것으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법에는 항상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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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8-03-31 11:49:24
정말정말 좋은 글입니다. 법조인들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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