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범 변호사의 법정이야기(100)-잊혀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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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범 변호사의 법정이야기(100)-잊혀진 사건
  • 신종범
  • 승인 2018.03.30 16:4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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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범 변호사
법률사무소 누림
가천대 겸임교수
http://nulimlaw.com/
sjb629@hanmail.net세로줄 삭제
http://blog.naver.com/sjb629
 

언제인가는 이 지면에 쓸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잊고 있었던 사건이었다. 대리한 사건이 아닌 바로 필자가 당사자였던 사건임에도 말이다. 그리고 어느새 100회째 되는 이 지면에 이제 그 사건 이야기를 쓰게 된다.

군법무관으로 임관한 후 상명하복의 엄격한 조직문화에 적응하기 힘든 때도 있었지만, 군내 법치주의의 파수꾼이라는 사명으로 뿌듯한 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군내 '불온서적'을 차단하라는 국방부 지침이 있었고, 이를 둘러싼 논란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군생활로 나를 이끌었다. 소위 '불온서적'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당시 국방부는 한총련이 군에 책 보내기 운동을 하면서 선정한 도서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하고 군내 반입 뿐만 아니라 소지하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불온’하다는 의미는 “온당하지 않음”. 즉, “판단이나 행동 따위가 사리에 어긋남”이라는 뜻이다. 당시 이러한 온당하지 않은 책으로 선정된 도서 중에는 세계적인 석학 노엄촘스키 교수가 쓴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저명한 경제학자인 장하준 교수가 쓴 ‘나쁜 사마리아인들’, TV 등에서 권장도서로 선정한 ‘지상에 숟가락 하나’, 대학 교양교재로 사용되고 있던 ‘세계화의 덧’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 때문인지 사람들은 국방부가 선정한 ‘불온서적’을 더 찾아 읽었고, 대형서점에는 국방부 불온서적 코너가 따로 마련되기도 하였다. 국방부가 불온하다고 판단하여 읽지 말라고 한 책을 사람들이 더 찾아 읽었고, 군인들마저 휴가를 가거나 집에서 읽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했다.

군내 법치주의 수호를 사명으로 하는 군법무관들 사이에서는 국방부의 '불온서적' 관련 지침이 군인의 알권리, 읽을 권리 등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실효성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본권을 제한하는 국방부의 지침이 법적 근거도 없다고 생각한 필자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받아 보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다른 군법무관들과 함께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주변에서 군인 신분이니 불이익을 당하지 않겠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별 다른 걱정은 없었다.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재판청구권을 행사했다는 것이 징계사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국방부 법무관리관실에서도 징계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냈지만, 윗선(?)에서 헌법소원을 낸 군법무관들을 엄하게 징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담당자를 바꾸어 가면서까지 징계절차가 진행되었다.

헌법재판소의 법적 판단을 받아 보자는 생각이 같았을 뿐 함께 모인 적도 없었는데 헌법소원을 낸 법무관들은 마치 한총련과 어떤 연계하에 조직적으로 국방부 지침에 저항한 것으로 징계서류들이 만들어졌다. 결국, 청구서 초안을 작성하고 함께 할 법무관들을 모은 2명의 법무관은 그때까지 유례를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던 파면 처분을 받았고, 나머지 법무관들 또한 감봉, 근신 등의 징계처분을 받았다. 당연히 부당한 처분이었기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당연히 부당하지는 않았는지 1,2심을 거치면서 파면 처분만이 취소되었고, 나머지 법무관들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파면처분이 취소된 법무관은 다시 정직 처분을 받고 군에서 강제전역되었다. 그 법무관은 다시 정직처분과 전역처분에 대한 취소소송을 제기하였다가 1,2심에서 패소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대법원은 사건을 접수하고 무려 5년 동안이나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이명박 대통령이 물러나고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을 했고, 강제전역을 당한 법무관 뿐만 아니라 필자를 비롯한 다른 법무관들도 모두 전역을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그 사건을 잊고 지내고 있었다.

얼마 전, 대법원이 가지고 있던 가장 오래된 사건의 판결 선고가 있었다. 촛불에 의해 정권이 바뀌고, 대법원장이 바뀌고 나서야 이루어진 그 판결은 잊고 있었던 바로 그 ‘불온서적’ 관련 사건의 판결이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원고의 재판청구권 행사가 정당한 지시에 불복종해 군 기강을 저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없고, 헌법소원 청구 전에 군 내부의 사전건의 절차를 거쳐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볼 법령상 근거가 없다”, “정신적 자유의 핵심인 학문과 사상의 자유의 기초가 되는 ‘책 읽을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불온서적 지정의 위헌성에 대한 의심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원고의 헌법소원 제기는 헌법과 법률에 의해 허용되는 권리의 행사일 뿐 군인의 복종의무 위반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고 밝히면서 징계가 정당하다고 본 원심 판결을 파기하였다. 인간의 기억으로는 잊혀져가는 사건이지만 역사는 분명히 기억하고 일깨워준다. '사필귀정'이라는 것을...

‘불온서적’ 관련 판결 선고가 있던 그 날 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구속되었다.

※ 그동안 인기리에 연재됐던 ‘신종범 변호사의 법정이야기’는 이번 100회로 마감하게 됩니다. 다음 번 연재부터는 ‘신종범 변호사의 시사와 법’ 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하게 됩니다. 새로 연재되는 ‘신종범 변호사의 시사와 법’에서는 앞으로 격주로 각종 시사 사건과 관련한 법적인 쟁점 등을 깊이 있고 흥미 있게 다루게 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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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준생 2018-04-01 01:37:26
지금까지 계속 애독해왔습니다.
필자께서 그 유명한 불온서적 사건의 당사자이신줄 몰랐네요ㅋㅋ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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