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업 변호사의 법과 정치(52)- 원칙과 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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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업 변호사의 법과 정치(52)- 원칙과 예외
  • 강신업
  • 승인 2018.03.09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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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업 변호사, 정치평론가

퇴계 이황의 부인은 지적 장애가 있었다. 한 번은 퇴계(退溪)의 집에서 일가친척과 문중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데 부인이 제사상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이것저것 음식을 집어 먹었다. 그러자 문중 어른들은 부인에게 직접 뭐라 하지는 못하고 퇴계에게 좀 나무랄 것을 청했다. 이 때 퇴계는 “그냥 놔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은 어머니 제사를 모시는 날인데 어머니께서 살아생전에 저 며느리를 무척이나 아끼셨는데, 그 며느리가 혼이 나면 어머니께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일가친척이나 문중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사를 지내기도 전에 제사 음식에 손을 대는 것은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큰 무례가 아닐 수 없을 터, 어쩌면 짐짓 부인을 꾸짖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퇴계는 달랐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제사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제사상을 차려 놓고 어머니가 아끼던 며느리를 혼내는 것은 어머니를 참되게 기리는 방법이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의범절이란 것은 인간 사회의 화평과 안녕을 위한 것이다. 때문에 어느 한 면만 생각하고 다른 측면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은 한편으론 도덕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비도덕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가령 퇴계가 제사예절을 이유로 부인을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혼낸다면, 그것은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 하여 남편과 부인 간에도 짐짓 예를 다하던 유교사회에서 큰 무례일 수 있다. 예절을 지킨다는 것이 오히려 인화(人和)를 해친다면 그것을 일러 도덕적 행동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도 마찬가지다. 법을 준수한다는 것이 오히려 정의에 부합하지 못한 일이 된다면 그것을 일러 합법적 행동이라 할 수는 없다. 법은 보편타당성을 지향하되 구체적 타당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예외 없는 법은 없다’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법은 원칙을 규정하지만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까지 그 원칙을 고집할 수는 없다. 원칙을 부르짖으며 마땅히 살펴야 할 특별한 상황을 살피지 않는다면 형식적 정의는 달성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 정의를 구현하기는 어렵다.

지금 우리는 과거 잘못을 드러내 응징하는 일을 목하(目下) 목도하는 중이다. 우리 사회에선 오늘도 권력을 남용해서 이런 저런 갑질을 하고 불법을 저지른 자들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는 일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불법을 저지른 자들을 법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숨 가쁘게 진행되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법의 원칙과 예외라는 기본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가사 누구의 어떤 행동이 구성요건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위법성조각사유는 없는지, 책임조각사유는 없는지, 양형요소는 또 무엇이 있는지를 꼼꼼히 챙기고 점검해서 구체적 타당성을 놓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도덕이든 법이든 그것이 규율하려는 인간의 행동과 그 행동이 일어난 상황은 천태만상(千態萬象)이다. 때문에 자구에만 얽매여 현실과 동떨어진 해석을 한다면 이는 도덕과 법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법은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똑같은 일을 두고 누구는 기소되고 누구는 불기소되고, 똑같은 사안을 두고 누구는 무거운 형을 선고받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면 법의 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은 또 다르게 평가받아야 한다. 분명히 불법을 행한 정도와 그 경위와 과정이 다른 데도 구폐청산이라는 시대적 분위기에 휩쓸려 각기 다른 사정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법의 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우리가 오늘 퇴계의 일화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원칙과 예외의 의미를 깊이 통찰하고 이를 실행하는 자세다. 밖으로 드러난 형식에만 경도되어 그 형식이 갖는 진정한 의미와 실질을 놓쳐서는 안 된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특히 형식적 정의만을 강조한 나머지 구체적 타당성을 소홀히 하고 결국 법의 궁극적 목적인 실질적 정의를 도외시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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