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희 판사와 함께 나누는 ‘회복적 사법’ 이야기 (4)- 피해의 회복과 피해자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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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희 판사와 함께 나누는 ‘회복적 사법’ 이야기 (4)- 피해의 회복과 피해자의 목소리
  • 임수희
  • 승인 2018.02.01 11:34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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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희 판사
서울남부지방법원

“피해자의 유족으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신데, 혹시 법정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방청석에 앉아 있는 최씨의 아들에게 공판에서 정식으로 발언할 기회를 주기 위해 재판장 권한으로 물었습니다.

최씨는 평생 바닷일로 번 전 재산인 퇴직금 5,000만 원을 두 달 안에 이익금 1,000만 원과 함께 돌려주겠다며 타운하우스 사업에 투자하라는 김씨 말을 믿고 전부 주었다가 영영 돈을 돌려받지 못한 채, 긴긴 기다림 끝에 고소, 수사, 그리고 지지부진한 재판이 이어지는 동안 끝내 자살을 하고만 사기 피해자입니다(3회 ‘형사사법체계에서 피해자의 자리’ 참조).

최씨의 안타까운 자살,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한 사람이 자살에 이르게 되는 데에는 정신의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여러 복합적 원인이 있을 터이고, 담당 판사에 불과한 저야, 단지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을 통해서만 피해자 최씨를 접했을 뿐 얼굴 한번 본 적 없기에, 최씨가 왜 그런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겠지요. 그래도 담당 판사로서 그 기록들을 보면서 떠오른 한 가지는 최씨 죽음의 한 가운데 있는 ‘책임’의 문제였습니다.

김씨는 최씨에게 두 달 안에 이익금 1,000만 원을 합쳐서 투자금 5,000만 원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두 달이 아니라 두 해가 지나도록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고, 고소 후 다시 수사에 1년, 재판에 2년, 결국 5년여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최씨 돈을 단 한 푼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피의자의 권리, 피고인의 권리로써 절차를 보장받으며 수사와 재판이 이어지는 동안 김씨가 해 온 변명과 방어의 중심에는, 아쉽게도 ‘진실’을 말하기보다 ‘책임의 전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일단 부인하고, 그 다음에는 손쉽게 댈 수 있는 것에다 둘러대고, 진상이 밝혀지면 다른 것을 둘러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위’로 인해 자신이 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는 바로 보려 하지 않고, 상황이나 여건, 그리고 숱한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만 끊임없이 피해의 책임을 돌렸습니다. 중간에 최씨를 소개해 주고 돈 심부름을 해 준 이소장을 탓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피해자인 최씨마저 왜 이소장 말만 듣고 돈을 주었냐고 타박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소개비를 주고 이소장을 시켜 최씨로부터 돈을 받아 자기가 써 놓고는, 돈 준 최씨에게 왜 돈을 주었냐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죠.

오래되고 두꺼운 수사기록과 공판기록 ― 새 임지에 발령받고 형사재판장을 맡게 되어 넘겨받은 사건들 중 가장 오래된 사건이었을 겁니다. 이미 2년을 넘겨 공판이 계속되고 있었지요 ― 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아니 최씨는 그런 책임전가적인 김씨의 언행을 대체 어떤 심정으로 대하며 그 세월들을 지나 왔던 것일까 갑갑함과 안타까움이 밀려 왔습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자기 피해에 대해 그 가해를 한 당사자에게 제대로 책임을 묻지 못할 때, 피해자는 과연 어떻게 그 피해를 회복하고자 하겠는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최씨는 오랜 기간 기다리다 고소를 해서도 긴 수사와 긴 재판 동안 가해자 김씨가 발뺌하는 모습만 보았지 피해가 전혀 회복되지 않았고, 좌절감에 초조해 지자 중간에 소개한 이소장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헷갈렸는지 가해자인 김씨한테 도리어 미안하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최씨는 김씨가 말로만 갚겠다 하면서 돈은 갚지 않은 채로 끊임없이 책임을 전가하고 심지어 피해자인 자신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하며 수년간 수사와 재판을 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세상에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고 국가에 원통함을 하소연해 보았자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가 없구나 하는 절망감에 빠졌을 터입니다. 그렇게 긴 기간 수사와 재판에서 김씨의 책임전가적 변명만을 계속 듣다보니, 최씨는 대체 누가 잘못을 했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을 터입니다.

일평생 바다에서 고생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다 늙어 남은 재산이라곤 퇴직금 뿐인데, 그걸 일순간 몽땅 날리게 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니, 그럼 누구를? 대체 누구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인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 뼈아픈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수사와 재판이 길어지면서 그것을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최씨는, 아니 그 책임을 물을 곳을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게 된 최씨는, 결국 그 책임을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것이 아닌지.

오래도록 굴려지며 두꺼워진 수사기록과 공판기록 안에서 들려오는 최씨의 대상 없는 원망 서린 목소리는 담당 판사인 저의 마음에도 괴롭게 울렸습니다.

공판을 열심히 준비했는데, 막상 피고인 김씨는 또 무슨 사정을 대며 기일에 출석을 못하겠다고 공판기일변경신청서를 냈습니다. 2년이 넘어가고 있는 재판은 거의 막바지에 있었고 그간 힘들게 이어 온 증거 조사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습니다. 무죄 추정과 불구속 재판의 원칙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피고인의 신병이 확보되어야 재판이 진행되고 나아가 유죄 판결 후 차질 없는 형 집행이 가능해 집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피고인의 태도는 도주 우려가 있는가 의심케 했습니다. 형사재판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올 것을 예상하는 피고인들이 갑자기 불출석하며 종적을 감추는 예는 종종 있으니까요.

저는 다음 공판기일 준비를 신중하게 하면서, 미리 피해자들에게 연락하여 법정에 나오도록 했습니다. 물론 죽은 최씨를 대신해서 진정서를 낸 최씨 아들에게도요.

다음 공판기일에 피고인 김씨는 출석을 했고, 그 날 증거조사 절차를 신중하게 모두 마무리 했습니다. 미리 연락을 받고 법정에 출석한 피해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기회를 한 사람씩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씨 아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서 법정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도록 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도록 피고인을 엄벌에 처해 주십시오.”
솔직히 저는 그 때 최씨 아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위와 같은 취지의 말을 짧게 하면서 굳은 얼굴, 건조한 표정으로 섰던 그 모습만큼은 지금도 또렷합니다.

최씨 아들의 말이 끝나자, 그 자리에서 김씨에 대해 마지막 공판을 앞두고 도주 우려가 있음을 들어 김씨를 법정구속 하였습니다. 최씨 아들과 다른 피해자들은 법정에 앉아서 교도관들에게 구속되어 들어가면서도 억울하다고 소리치는 김씨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날 이후 신속히 진행된 판결선고기일에 김씨에 대한 유죄 판결과 징역형의 선고가 이루어졌습니다.

김씨 구속 후 최씨 아들은 재판부에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만, 그 편지마저도 가슴이 저미고 최씨에게 죄송스런 마음으로 내내 무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형사사법제도란 것이 가해자의 법익 침해에 대한 형사책임을 절차적으로나 실체적으로나 적정하게 물어서 법익을 보호하고 사회를 보호하며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그 기능을 제대로 다해야 할 것입니다만, 그뿐 아니라 바로 그 범죄의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피해를 제대로 회복 받고 적절히 구제될 수 있도록 기능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인 피고인의 인권 보장을 위한 수사에 있어서의 적법절차 원칙, 공판에 있어서의 무죄추정 원칙과 그에 기반한 불구속 수사·재판원칙 및 공판중심주의, 이 자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만, 이 사건에서 피고인인 김씨가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위와 같은 권리들을 보장받으며 차고도 넘치게 방어의 기회를 누리는 동안, 어찌하여 피해자인 최씨는 피해 당사자임에도 절차에서 철저히 객체적, 수동적 입장에만 놓여 있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어 버린 것인가,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남았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떠신가요. 수사든 재판이든 형사 절차에서 피고인의 인권 보장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대 원칙입니다. 인류 역사상 숱하게 흘려 온 억울한 피 위에 문명국들의 헌법과 법률로 하나씩 세워 온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중요한 형사절차상 대원칙이 바로 피고인의 인권 보장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실제 피해 당사자인 피해자가 객체적, 수동적 지위로 전락해서는 안 되고 피해의 회복이나 구조의 적절한 시기를 놓쳐서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피고인의 인권 보장과 피해자의 구제 내지 피해 회복, 이 두 가지를 모두 제대로 도모하고 실현해 낼 수 있는 형태로 형사절차가 구성되고 운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요.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사건에서 제가 최씨 아들을 비롯한 피해자들로 하여금 법정에서 말하도록 한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피해자가 재판에서 진술할 권리를 실현시킨 것인데요. 우리나라는 1987년 헌법 개정으로 헌법 제27조 제5항에 ‘형사피해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당해 사건의 재판절차에서 진술할 수 있다.’고 이를 헌법상 권리로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형사소송법 제294조의 2에서 원칙적으로는 증인신문 방식으로 피해자의 재판절차 진술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경우 최씨 아들을 비롯한 피해자들이 재판절차 진술권을 행사하겠다고 신청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재판장으로서, 첫째, 2년 정도 이미 공판이 진행된 사건을 넘겨받고 공판절차를 갱신해야 하는 입장에서 단지 기록상 증인신문조서에 기재된 문구로서만이 아니라 간단하게라도 직접 피해자들의 진술을 면전에서 듣고 사안의 실체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겼고, 둘째, 유무죄 여부의 심리와 양형 심리 절차가 분리되어 있지 아니한 우리 형사소송 절차에서, 유무죄 심리를 마무리하는 증거조사 절차 말미에 피해자들의 말을 직접 들어서 범죄의 결과와 피해의 내용, 피해 회복 정도, 피고인의 피해 회복 노력이나 태도 등 양형 요소를 확인할 필요도 느꼈기 때문에, 증거조사 마무리 기일에 피해자들을 법정에 불러 진술토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또 중요한 이유는, 다른 피해자들보다 금전적 피해의 크기는 작았지만 그 돈이 삶 전체에 미친 타격이 컸고 결국 삶 전체가 무너지게 되어 목숨까지 잃게 된 최씨의 경우, 적어도 유족인 그 아들의 입을 통해서나마 법정이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피해자인 최씨와 그 유족의 목소리가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그리고 국가와 사회에 들려지도록(To be heard) 하는 하나의 과정이나 절차랄까(Procedure) 또는 하나의 의식이랄까(Ritual),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가해자의 사과나 금전 보상 같은 것과도 궤를 달리하는 피해의 치유와 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 같습니다.

피해자가 피해를 말한다는 것, 즉 가해행위로 인해 어떤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가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 결과가 어떠한지, 그러한 피해가 회복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그래서 무엇을 원하는지, 그에 관해 ‘피해자 자신이 자기 입을 열어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한다는 것’, 이것은 매우 여러 측면의 복합적 의미를 가지는데,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피해자 자신 내부에서의 피해로부터의 놓여남과 그로 인한 피해의 치유, 그 큰 의미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뒤늦게나마 법정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렇게나마 최씨와 그 유족들의 피해 회복에 도움이 되기를 바랬습니다마는, 어쨌든 이 사건에서 최씨의 사망이라는 비극적 결과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는 점과 최씨가 사기당한 돈이 그런다고 돌아오는 것도 아니라는 한계적인 답답함이 그 이후 계속하여 저로 하여금 현 형사사법제도의 한계 지점들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아가 ‘회복적 사법’이라는 패러다임에 관심을 갖도록 한 계기가 되었구요(아 참! 최씨가 사기 당했던 5,000만 원은, 결국 김씨가 구속되고 징역형을 선고받은 후 항소심에서 감형받기 위해 유족들에게 3,000만 원 주고 합의하면서 일부 회복되었습니다.).

‘피해자가 말하는 것’,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관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면서 본격적인 회복적 사법 이야기로 더 들어가 보도록 할 텐데요. 아쉽게도 벌써 지면이 다 찼네요. 다음 회에 이어서 이야기 나누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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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낭화로 2018-02-09 11:49:53
본인이신 검사님뿐아니라 판사님의 역할또한 과소평가할수 없는 일일 것이니다.
인간사 사필귀정이라더니 사법역시 법필귀정이구나하는 느낌을 지울수 없습니다.
계속대는 재미있고 의미있는 글또한 기대됩니다

금낭화로 2018-02-09 11:45:33
갈수록 더 흥미진진하네요. 피해자를 대신한 최씨 아들 ,가해자 김씨.판사님 세분이 연출하신 한편의 법정드라마입니다.
법정에서도 반성은 하지아니하고 변명과 시간끌기에 급급한 가해자의 일탈행위에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가슴졸였는데 법정구속이라는 결단과 실형선고라는 형벌로써 피해자가족에게 마음의 상처를 어느정도 치유해주었을 뿐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짜릿한 쾌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후 가해자가 감형받기위하여 어느정도의 합의금으로 피해자에게 주었다는 것까지 합치면 회복적 사법의 기능을 톡톡히 수행한 셈이고 그 기능 수행의 장

돈잃은상실감 2018-02-07 13:36:09
돈 오천만원에 삶을 다 무너뜨렸네요
누군가에게는 큰금액도 아니였을텐데
최씨에게는 삶전체가 송두리째 흔들릴정도의 액수였나봐요
같은크기의 장애물이라도 누군가에겐 그냥 밟고 지나갈 돌멩이에 불과한거라도
다른 누군가에겐 생애평생을 걸쳐 넘으려고 해도 절대로 넘을수없는 난관처럼 그랬나봐요
그저 오만원이였을뿐인데...
최씨는 돈오천만원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기 힘든 장애물처럼 느끼고서 힘들었을꺼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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