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11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자와 17년간의 중곡동 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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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11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자와 17년간의 중곡동 땅 사건
  • 이시윤
  • 승인 2018.01.1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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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 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변호사
前 감사원장, 헌법재판관

조선왕조 마지막 왕자로 거론되는 인물은 여럿 있다. 고종-순종-영친왕-이구(玖)로 이어지는 계보의 이구씨가 직장손으로 대표적 인물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순종이 황제였으니 만큼 그를 황태손(皇太孫)이라 한다. 한편 고종의 장자는 아니나 여러 적자 중 출중하였다고 평가받은 이강 의친왕의 막내아들이고 ‘비둘기처럼’ 노래로 명성을 날린 이석(李錫)씨도 마지막 왕자라고 한다. 그는 일제시대의 이왕청에 18세로 전화교환수로 취업한 어머니를 의친왕인 아버지가 간택하여 막내가 되었다는 것인데, 이 사건 이야기는 이석씨의 맏형인 이건(李鍵)과 관계된 것이다.

서울 성동구 중곡동 일대의 20만평 가까운 주택지는 원래 순종의 동생인 의친왕 이강(李堈)공의 장남인 이건(李鍵)의 소유였던 것이 공전의 소송의 큰 회오리에 말려들었다.

처음은 이건이 해방 후 이 사건 원고와의 재판상 화해를 하여 그 토지를 원고 앞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넘겨주었다. 그런데 등기를 넘겨받은 원고는 이를 이 사건 피고에게 전매(轉買)하고 계약금만 받은 상태에서 피고에게로 소유권이전등기를 하여 주었다.

한편 계약금만 건넨 피고는 원고와의 계약을 해제하고 원소유자인 이건으로부터 이를 직접 매수하였으며, 원소유자인 이건이 일찍이 재판상 화해로 원고에게 등기를 넘겨 준 것은 명의신탁이라 하면서 이건이 이를 해지 통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원고는 피고를 상대로 피고명의로 넘긴 소유권이전등기말소청구를 1962년에 제기하여 대법원에서 1968. 6. 25. 선고67다1776 판결로 원고승소의 확정판결이 났다.

그러나 그 뒤에 이러한 원고승소의 확정판결에는 재심사유가 있다고 하여 피고가 ‘재심원고’가 되고 원고를 ‘재심피고’로 하여 재심의 소를 제기 하였으나, 3심인 대법원은 피고의 재심청구를 인용하여야 한다는 취지로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였다. 재심청구의 인용은 많지 않은 예외이며, 당시 주심은 검찰출신의 나길조 대법원판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에 환송받은 2심 법원은 피고의 재심청구기각의 종전결론을 바꾸지 아니하는 판결을 하여 피고가 재상고 하였던 것이며, 이에 대법원은 재심청구인용취지로 2차로 파기환송하였다.

그러나 2차 환송받은 서울고법은 환송이유가 법률판단의 잘못이라기보다 사실판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같아 종전의 2심 결론대로 재심청구를 기각하였다. 이에 피고가 재재차 상고→대법원 3차 파기환송에 이르고, 드디어는 환송법원이 재심청구인용→대법원에 원고상고→대법원 상고기각, 그러면서 무려 10심급 가까이를 거듭하였다. 고등법원이 몇 차례에 걸쳐 대법원 판결에 반하는 하극상(?)을 한 ‘핑퐁판결’의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었다. 1962년 처음 시작된 소송이 1979년에 종결되면서 무려 17년이란 장기간 이전투구(泥田鬪狗)를 거듭한 사례이기도 하다.

소송혐오의 대표사례가 되어 모 일간지에 승소피고와 인터뷰까지 실릴 정도였다. 승소피고의 말은 승소액 700억 중 유형·무형의 비용으로 절반 가까이 썼기 때문에 이겨봐야 ‘상처뿐인 영광’이었다는 것이다. 인지대, 심급마다 치르는 변호사보수, 기타 교제비(?) 등등 이었을 것인데, 비용지출의 내막은 밝히지 아니하였다. 당시 제2차 대법원 파기환송시에 환송받은 2심재판부의 주심판사였던 필자에게 법원 출입 Intelligent Officer가 판결선고 전날에 ‘우리 (정보)부장이 관심있는 사건이니 결론을 미리 알려달라’는 전화연락을 하기에 「판사는 판결선고 전에는 처에게도 비밀로 하며, 그것이 법원조직법이며 본분이다」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여기저기 인맥, 친맥도 많이 동원되었던 사건이었던 것 같다. 소송물 가액이 엄청날 뿐 국가안보에 직결하는 사건이 아닌데 왜 높은 분이 비상한 관심을 갖는가 매우 의아했다. 정보부 전성시대이니 그 이유를 물어볼 처지도 아니었다. 하급심이 불복을 거듭하는 사건이라면 대법원이 그 중간쯤에 민사소송법 제437조에 따라 파기자판으로 종지부를 찍었어야 할 사건인 것 같은데, 왜 자판하지 않고 환송만 거듭하는지 의아한 생각도 드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핑퐁재판’으로 17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송사가 거듭되는 동안 일찍이 재심 전 소송에서 승소한 원고로부터 이 토지를 매수하여 그 위에 주택을 짓고 살고 있는 500여 세대의 사람들이 재심승소의 피고에게 집단 반발을 하며, 이에 쫓긴 피고가 선의취득자에게 자기권리를 포기한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자기 말대로 쓴 막대한 비용을 합하면 ‘소송으로 흥한 자, 소송으로 망한다’라는 말이 상기되기도 한다.

이 사건은 조선왕조의 왕손인 이건이 해방 후 일본으로 귀화함으로써 이 토지가 외국인토지법의 적용을 받아 그 해석이 문제되었던 사건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이건 씨가 중곡동 땅을 먼저 원고에게 양도한 것을 피고에게 또 매도함으로써 이중매매 때문에 꼬인 요인이 되었다 할 것이므로, 왕손의 부적절하고 씁쓸한 처신이 남긴 후유증이 아닌가 생각한다.

2013. 5. 21.자 중앙일보 기사에 의하면, 일본의 시즈오까(静岡)에 있는 유명한 전통여관인 초세이칸에 대하여 보도하면서, 이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장남 이건(李鍵)이 한때 이곳에 머물렀다. 고종의 장손자이자, 영친왕의 조카인 이건은 일본 육군장교로 근무하다가 모국이 해방된 후 일본에 귀화(1995년) 했다. 모모야마 겐이치라는 일본인으로 문구점·팥죽장사 등을 하며 기구한 생을 마쳤다.」 재일동포 소위 ‘자이니치(在日)로 살았던 사람 중 한 사람의 애환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17년 만에 끝난 대표적 장기전이나, 일제 강제징용피해자들의 신일본제철주금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사건도 먼저 일본법원에 제소했다가 패소한 뒤 우리나라 법원에 와서 다시 제소하여 대법원에서 파기환송의 판결이 나고 환송심판결에 다시 상고하여 계속되는 등 17년간 소요되는 기록을 냈다. 햇수로 중곡동 사건과 쌍벽을 이룬다. 그 사이에 일부 당사자가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월남참전군인들의 다우케미칼, 몬산토 등 상대의 고엽제피해의 손해배상 사건도 그에 못지않게 만성적 장기소송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일찍이 19세기 영국의 명 재상인 글래드스턴(Gladstone)이 ‘지연되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라고 했다. 독일의 민형사대법원장이었던 Ideusinqen는 ‘권리보호의 지연은 권리보호의 거부와 같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적법절차를 무시하고 속도만 내기 바쁘면 재판을 가장한 촌극(인민재판)이 된다. 소송에서 경계할 것은 지나친 지연과 바쁜 속도전도 아닌 중용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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