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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센인의 ‘친구’가 된 변호사, 박영립 화우공익재단 이사장
김주미 기자  |  hova@l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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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11  10:3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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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처음 알파벳 익히고 9년 뒤 사시 합격
10년 넘는 노력 끝에 보상받은 한센인 사건
“오해 있었지만 한센인 통해 내가 치유 받아”
“남과 비교 않고 감사할 때 많은 일 가능해”


[법률저널=김주미 기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늘이 내린 형벌’로 인식됐던 한센병. 한국에서는 문둔병, 나병 등으로 불린다.

한센병은 6세기 경 처음 발병하여 한때 세계 전역에서 위세를 떨쳤던 전염병인데, 의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부쩍 보기 드물어진 ‘후진국병’이다.

이 병은 피부병이기에 상흔이 남는다. 증세는 다양하지만 피부조직이 ‘문드러지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인들이 한센인들에게 거부감을 보이는 것도 ‘나도 전염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더하여 썩은 피부 조직에 대한 시각적 불편함이 큰 이유가 되고 있다.

하지만 변호사들 중에 이러한 한센인의 친구가 된 사람이 있다. 십여 년 넘는 세월을 한결같이 그들 곁에 가 손을 잡고 이야기 나누는 ‘진정한 친구’이다.

지난달 23일, 화우공익재단의 제2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박영립 변호사가 바로 그다. 한국의 ‘전후 세대’가 대부분 그랬듯 박 이사장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가운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으나, 무작정 상경하여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모교인 숭실대학교에 입학한 때, 중고등학교 교복을 못 입어 본 한 때문에 제일 먼저 교복을 맞춰 입고 다녔던 일화를 전하면서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화우 공익재단의 전임 이사장인 이홍훈 전 대법관이 많은 활동을 통해 기틀을 다져놓은 만큼, 그 자신은 기존의 것을 유지‧발전시키면서 한편으로는 변호사 업무 영역 개척으로까지 이어지는 공익활동을 펼쳐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한센인과의 인연, 그 시작은

박 이사장은 변호사가 된 초기부터 사회적 약자를 위한 각종 공익활동에 주력했고, 서울지방변호사회 및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을 역임하면서는 다양한 공익활동을 해 왔다. 그렇기에 스스로 ‘제법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변협 인권위원장을 맡고 있던 2004년 5월, 일본에서 자신을 찾아온 두 명의 변호사를 만나고서는 그 자부심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을 받게 된다.

“(그때 찾아 온 일본 변호사들은) 일본이 국가적으로 한센인들의 인권 침해를 자행한 데 대하여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해 승소판결을 받아 낸 변호사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이 식민지 시절 일본에 의해 똑같은 피해를 받았던 대만과 한국의 한센인들까지 찾아 배상받게 하고 싶어 도움을 얻고자 저를 찾아온 겁니다. 그때서야 저는 한국의 한센인들 사연과 소록도에 대해 알게 됐어요. 한국인 피해자들을 위해 한국 변호사가 아닌 일본 변호사가 나섰다는 사실도 부끄러웠지만, 그동안 한센인들 같은 ‘약자 중의 약자’를 돌아보지 못한 저 자신에게도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일본 재판부에 제기하는 소송이므로 한국 변호사로서 소송에 나설 수는 없었고, 일본 변호사들을 돕기 위한 자료 지원 등의 도움을 제공하기로 했다.

즉각 대한변협 내 ‘한센인 변호단’을 꾸렸고 직접 소록도를 방문하기도 하는 등 상당한 열성을 보였다. 이에는 당초 60여명의 변호사가 참여했다고.

그가 말했다. “처음에는 아내가 말리더군요. ‘꼭 직접 가서 (한센인들을) 만나야 하느냐’고 걱정을 했죠. 주변에서도 ‘도움만 주면 됐지 그렇게 적극적으로 할 것이 뭐냐’는 우려를 했습니다. 당연히 저도 찝찝한 마음이 한켠에 있었어요. 하지만 의사 등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공부도 하고 알아보니, 이 병이 감기보다도 전염율이 낮은 겁니다. 약 한 번 먹으면 전염율이 99.99% 떨어져 버립니다. 단순한 신체 접촉으로는 감염되지도 않는데, 이 병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이들을 끔찍한 차별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편견이 걷히자 그들을 향한 박 이사장의 발걸음은 빨라졌고, 그들을 만나는 횟수가 늘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과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친구’가 됐다.

그가 기자에게 권유했다. “꼭 소록도에 찾아가 보십시오. 매사에 감사하고, 근면‧성실하게 생활하며, 참으로 순수한 그분들에 의해 나 자신이 치유되는 것을 경험할 겁니다.”

대만은 되고, 한국은 안 된다?

박 이사장에 따르면, 그를 찾아온 일본 변호사들이 일본 법원에 제기한 한센인 피해자 손해배상소송은 1998년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문명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후진국병’인 한센병이 여전히 창궐하는 데 대하여 고민이 깊었다.

그래서 일본은 ‘나예방법’이라는 법률을 제정해 그 법률을 근거로 전국의 13개 요양소에 한센인들을 모아 강제격리 시킨다.

1996년 이 법은 폐지됐지만, 일본 변호사들은 이 법이 한센인들의 거주이전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했음을 이유로 1998년에 위헌확인 및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소송은 3년만인 2001년에 승소 판결이 났고, 강제격리 기간에 따라 만 여 명에게 1인당 (우리 돈으로) 8천만 원에서 1억 4천만 원 정도의 보상을 받아 냈다. 판결이 난 지 한달만에 제정된 보상법에 근거하였다.

하지만 일본 변호사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일한 정부의, 동일한 정책으로, 동일한 피해를 받은 대만과 한국의 한센인 피해자들에게까지 시선을 돌렸다.

박 이사장을 비롯한 변호인단이 이들의 소송을 돕기 위해 모은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1916년부터 해방 때까지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반도의 한센인들을 모아 소록도에 강제 격리시켰다.

그 숫자가 4천 명에서 해방기 즈음에는 6천 명에 달했다. 이들은 일본의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강제노역에 시달렸으며, 전세계적으로 우생학 연구가 활발한 1930년대에는 생체실험의 대상이 됐다.

또 열성 유전자를 근절한다는 의도에서 한센병이 유전되지 않음에도 불구, 남성은 단종수술을, 여성은 낙태수술을 강제로 행했다.

이윽고 2005년 10월 25일, 일본 재판부는 한국에 대하여는 패소 판결, 대만에 대하여는 승소 판결을 내렸다. 동일 법원에서 같은 날 나온 판결이지만 각 재판부는 다른 결론을 낸 것이다.

한국 피해자에 대하여는 “(일본) 현행법 해석상으로는 타국의 피해자들에게까지 보상할 수 없다”고 설시했고, 대만 피해자에 대하여는 “법이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입법의 미비에 불과하므로 보상을 해 줘야 한다”고 설시했다. 명백히 부당한 결론이었다.

지난한 소송의 과정
 

   
 

분노한 한국의 변호인단과 일본 변호사들은 일본 후생노동성 앞에 가서 농성을 시작했다. 2005년 10월 27일에는 한국 종묘에서 천여 명이 모여 ‘일본 부당판결 규탄대회’를 열었다.

그 동안 일반에 노출을 꺼려 왔던 한센인들도 이날만큼은 용기를 내어 거리로 나왔다. 종묘에서 일본대사관까지 거리행진을 하고, 돌아가면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인 시위를 했다.

한국에서 20여만 명, 일본에서 20여만 명, 대만에서 몇 천 명, 약 50만 명의 서명을 받아 일본 정부에 전달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일본 국회의원들에게 꾸준히 입법청원을 한 것은 물론이다.

급기야 2006년 2월, 일본 국회는 한국의 피해자들과 대만의 피해자들을 명시적으로 보상받게 하는 내용의 법을 개정했다.

하지만 강제격리 사실과 한센병 치료 사실을 입증할 자료 제출을 요건으로 하는 바람에 보상자 수는 대만 25명, 한국 3명에 그쳤다.

해방 이후 여러 이유로 소록도에서 한센인 학살이 자행됐고 6‧25 전쟁까지 거치면서 한국 피해자들에 대한 자료는 대개가 소실된 까닭이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박 이사장을 비롯한 변호인단은 주저앉지 않았다. 한 달에도 두세 번씩 전국의 한센인 정착촌과 소록도 등을 다니며 관련자들을 수소문하고 피해자들의 피해사실과 병을 입증할 자료를 모았다.

그 기간이 10년이 됐다. 당초 60여명이던 변호인단 숫자는 이 긴 세월동안 어느덧 열 명 남짓으로 바뀌었다.

하늘마저 감동할 박 이사장과 한센인권 변호사들의 노력 끝에 결국 2017년 2월, 총 590명의 피해자들이 일본으로부터 1인당 (우리 돈으로) 1억 원 정도씩을 보상받았다.

한편 이 소송을 준비하던 중 한국 변호인단은 한국 정부에도 보상을 요구했다. 해방 이후 한국 정부 역시 한센인들에게 단종과 낙태수술 등 인권침해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보상하는데 우리 국민에 대하여 한국 정부가 보상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정부는 이러한 문제제기를 수용은 했지만, 그 내용이 반쪽에 불과했다. 2007년 제정된 (한국의) 보상법은 한센인 피해자들에게 의료비 지원 정도만 한다고 못 박은 것이다. 시행일은 2008년이었지만 그마저도 이행되지 않았다.

법 시행일로부터 3년이 다 되어가는 2011년, 박영립 이사장 및 한센인권변호단은 이러한 정부에 대하여 상징적으로라도 소송을 제기해야겠다고 결심,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난해 2월, 대법원에서 나왔다. 538명에게 1인당 단종 피해자 3천만 원, 낙태 피해자 4천만 원 배상 판결이다.

‘시다(보조직원)’ 일 전전하던 소년의 꿈

가출이나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는, 그의 장래를 위해 어떤 뒷바라지도 해줄 수 없던 가정을 등지고 무작정 상경했다.

사람 많다는 서울 땅이었지만 14살 소년에게 일을 맡겨 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야말로 살벌한 ‘취업난’이었다.

인력시장에 나가 새벽부터 줄을 섰다. 공을 치는 날에는 주린 배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다.

식당이나 여관 같은 데서 시다를 시켜주면 감지덕지였다. 월급은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먹여주고 재워줬기 때문이다.

시다 일은 한 곳에서 오래하기 어려웠다. 여러 곳의 시다로 전전하다가 한 양복점에 취업했을 때, 그나마 그로서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게 된 셈이었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기능올림픽에서 양복, 제화 부문의 금메달을 두세 개씩 따오던 시절이다. 양복점에 취업한 그도 기능올림픽을 목표로 하여 열심히 기술을 배웠다.

지금도 ‘양복기술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당시 그는 충분히 양복 기술을 익혔지만, 애석하게도 경영을 잘못한 양복점 주인이 망하는 바람에 또다시 거리로 나오게 됐다.

마침 기성복 바람이 솔솔 불던 때라 그는 양복 기술자의 꿈을 접었다. 이후 동대문 시장에서 점원 일을 했는데 그 무렵 그는 ‘나도 점포를 하나 가져보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됐다.

점포를 갖기 위해 필요한 세무나 경리 등의 업무를 배우고자 알아보던 차 ‘검정고시 학원’의 존재를 알았다.

중학교 졸업자격을 얻는 검정고시를 준비하기로 결심한 것이 그의 나이 20세다. 초등학교 졸업 8년 만에 처음 알파벳 a, b, c를 그려본 것이다.

“당연히 주변의 반대와 비아냥이 많았습니다. ‘지금 공부 시작해서 박사 될래, 교수 할래’, ‘일하기 싫으니까 딴 짓이지’ 등의 말이었죠. 물론 이해는 합니다. 그분들이 저 잘못되라고 그런 말 했겠습니까. 그분들의 기준에서 조언을 한 것이겠죠.”

하지만 결국 그가 내린 결정은 ‘도전’이었다. ‘내 인생을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생각, 따라서 ‘진심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교복을 입지 못한 한(恨) 때문에...

뒤늦게 시작한 공부였기에 ‘피땀을 흘리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박 이사장은 ‘사법시험 준비할 때보다 더 열심히 했다’고 회고했다.

그런 그의 성적은 너무 좋았다. 그가 다닌 학원에서는 우수인재 홍보를 통해 학원의 주가를 올리고자 그에게 고등학교 검정고시 응시를 권했다. 무료 수강 혜택도 제공했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그는 이렇게 ‘얼떨결에’ 고등학교 졸업 자격까지 따게 됐다. 하지만 합격하면 훨훨 날아갈 줄로만 생각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합격을 했는지 안 했는지 표시가 나는 것도 아니어서 허망한 마음마저 들더라는 것이다.

그때 박 이사장은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대학이 어떤 데인지 한 번 가보기나 하자’는 생각을 했다. 어디까지나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전부였을 뿐 대학교를 졸업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끝까지 다닐 학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절실함이 부족했던 탓인지 전기 입학시험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낙방의 쓴 맛에 심기일전한 그는, 그가 살던 상도동에 소재한 숭실대를 목표로 잡고 후기 시험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과목이 몇 개 없는 검정고시 공부에 비해 많이 어려웠지만, 절박함이 통했을까. 그는 숭실대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됐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이 대목이었다. “중고등학교 교복을 입어보지 못한 한이 있었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제일 먼저 교복을 구해 입고 학교 배지(badge)를 달고 다녔습니다. 교복 입고 대학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하지만 저는 감히 대학에 올 수가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대학을 다닌다는 감격 때문에 그렇게 하고 다녔습니다.”
 

   
 

학비가 없어 학교를 그만 다니려 했던 그에게 학교가 장학금을 계속 주는 바람에 그는 예정에도 없이 다음해 진학, 또 그 다음해에도 진학하는 식으로 결국 대학을 졸업했다.

도서관에서 여러 책을 보며 졸업 이후의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처음으로 법조인이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법조인이 되려면 사법시험을 보아야 한다는 정보를 접했다.

미션 스쿨인 숭실대에서 의무적으로 시행한 채플 수업을 통해 ‘소명’ 의식을 갖게 된 그는, 신이 자신에게 ‘변호사로서 약자를 돌보고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살라’는 소명을 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길로 그는 사법시험에 뛰어들었다.

당시 재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하면 이유는 대개 ‘편입’이었다. 편입 준비생들 사이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도서관을 지킨 박 이사장은, 알파벳 공부를 시작한 지 9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무지했으니 용감했죠. 대학 입학해서 혼자 교복을 입고 다닌 것도, 숭실대학에서 사법시험에 도전한 것도, 잘 몰랐기 때문에 ‘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내가 나보다 잘난 남과 나를 비교하며 기죽기만 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죠. 비교의식을 갖지 않고 감사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인 것 같습니다.”

그가 지닌 소명의식 때문일까. 공익활동에 대한 그의 의지는 더욱 굳건해 보였다. 화우공익재단의 제2대 이사장으로서 앞으로 3년 임기 동안 펼칠 그의 행보가 자못 기대되었다.

인터뷰 김주미 기자, 사진 조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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