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맞은 연세대 로스쿨 백태승 교수 회고담 “학자의 길, 보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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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맞은 연세대 로스쿨 백태승 교수 회고담 “학자의 길, 보람 있었다”
  • 김주미 기자
  • 승인 2017.11.28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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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사법학회 부회장, 한국인터넷법학회 회장 등 지내
학계 족적은 물론 모교인 연세 법대 발전에도 여러 功
“이후에도 공부하고 배우는 자세로, 소나무처럼 살겠다”

[법률저널=김주미 기자] 그의 초등학교 시절은 화려했다. 60년대 초중반, 전국 초등학교에는 이상하리만치 야구 붐이 일었는데 달리기를 잘 했던 백태승 교수도 4학년 때 야구선수로 뽑혀 으스대며 선수 생활을 했다.

녹초가 될 정도로 피곤해도 매일매일 그가 연습에 매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야구시합을 마치면 육성회장이 선수들을 모두 데리고 가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주었기 때문이라고.

백태승 교수는 “보릿고개가 있어 쌀밥도 못 먹던 시절 누리던 호사였으니,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짜장면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특출난 수비실력으로 인근 중학교 체육교사로부터 스카웃 제의까지 받았던 실력자로, 자칫하면 야구선수로 인생 살 뻔 했다는 웃음 섞인 소견을 전하기도 했다.
 

▲ 지난 4일 연세대 법전원 국제회의장에서 백태승 교수 정년 기념 학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백태승 교수는 회고담을 전했으며, 양창수 교수는 '미래사회와 민법학'이란 주제의 기조발제를 하기도 했다. 사진은 이날 참석자 단체사진 / 사진 김주미 기자

그가 아직 야구 선수이던 6학년 때는 우연히 친구따라 소년한국일보 주최 전국미술대회에 나가 판화를 팠다가 대상을 받고 신문에 크게 보도되는 대박 사건을 터뜨리기도 했다.

백태승 교수는 “칼이 너무 무뎌 힘주어 깊게 파다보니 원래 의도보다 저절로 약간 삐뚤어지게 됐다”며 “이것을 두고 심사위원들이 새로운 터치기법이자 기가 막힌 구도라고 평했다”고 말해 좌중을 웃게 했다.

1964년 시상식 및 한국일보 간부들과의 환담을 위해 상경했다가 ‘오스카상 같은’ 트로피와 우승기를 받고 금의환향한 백태승 교수는 ‘운동도 잘 하고 미술도 잘 하는’ 일약스타가 되었다.

강릉시내에서는 행사 퍼레이드가 있을 때마다 백 교수더러 ‘오스카상 같은’ 트로피를 들고 나와 행진하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상당히 쑥스러웠다는 고백이다.

그런데 그는 하필 공부까지 잘 했다. 입학 성적이 너무 좋아 성적장학생으로 중학교에 진학한 그는, 이후 그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중학교 시절 내내 모범생으로 지냈다고 한다.

반면 고등학교 시절에는 방황도 했기에 그때 무엇을 배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교인 연세대학교에 오게 된 것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린 것이 아닌가 하는 심경이라고.
 

▲ 백 교수가 학술회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그의 첫 직장은 한국은행이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일에서 크게 보람을 느끼지 못했고, 오로지 그곳을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던 시점, 학계로 왔다.

이렇듯 당초 학문에 대한 치밀한 계획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사법시험을 준비한다면서도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던 여한이 남아 있기도 하여 학계로 오게 됐다.

그는 그가 유학했던 독일 서남부의 중소도시인 프라이부르크를 ‘마음의 고향’이라고 했다. “품성 좋은 Frank 교수를 만나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며 “그분들(Frank 교수 부부)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90년부터 모교인 연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된 백태승 교수는 “그것도 행운”이라고 말했다.

교내 보직은 물론 특허법무대학원 신설을 위해 정신없이 바빴던 시기를 보내고 2000년대에는 학교 학생처장으로서 4년간 운동권 총학과 씨름하며 학교 발전을 고민했다.

그때 백 교수와 씨름했던 총학생회장들이 공대나 상대 출신이었음에도 불구, 뒤늦게 사법시험을 치거나 법학계에 진출해 현재 변호사 또는 연구원으로서 맹활약하고 있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는 이를 두고 “다 학생처장 덕분이 아니겠냐”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한편 그는 “민사법학계에 큰 공을 세우지는 못한 것 같다”는 심경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겸허한 말과는 달리, 지난 4월 25일 법무부는 ‘제54회 법의 날 기념 유공자에 대한 정부포상 전수식’에서 백 교수에게 홍조근정훈장을 수여했다.

민법개정위원회 분과위원장 및 전자문서법 개정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관련 법규의 개정 추진 등에 참여하는 등 국민을 위한 법·제도 개선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백 교수는 민사법학회 연구이사로서 당시 회장이던 이시윤 변호사와 1999년 민법 개정의 첫 단초를 연 것은 큰 보람이었다고 전했다.

이시윤 회장과 함께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고 박상천 장관을 찾아가 민법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한 끝에 성사시킨 것은 민법학계에 남은 하나의 족적으로서, 그의 노력도 상당 부분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 지난 5월 2일 본지와의 인터뷰 당시 백태승 교수 모습 / 사진 강미정 기자

백태승 교수는 모교 동창회의 장학사업을 위해서도 갖은 애를 썼다. 그는 “IMF로 대우그룹이 해체되는 순간에도 국가고시기금 20억 원 기부 약속을 지켜주신 김우중 회장님, 돈만 생기면 장학금으로 쾌척하느라 당신은 아주 검소하게 사시는 이종흡 회장님, 법대 정원 증원에 결정적 도움을 주신 고 박영식 장관님, 공대 정원을 줄이면서까지 법대 정원 증원에 힘써 주신 김우식 총장님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많은 분들에게 고맙고 우리가 잊을 수 없다”며 감사를 표했다.

백 교수는 또 그 자리에 참석한 로스쿨 학생들에게 “왜 법학을 공부하는지 심각하게 자문해 보고 치열한 고민 끝에 공부하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하루하루 성실히 공부하다 보면 어느덧 목표 지점에 다다랐다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며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듯한 격려의 말을 전했다.

백태승 교수는 “우뚝 선 바위는 못 된 것 같아 부끄러움이 있지만, 정호승 시인의 ‘벽돌’이란 시처럼 누구의 발 밑에든 깔려 그를 단단히 받쳐주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면 학자로서 나의 길은 그래도 보람찼다고 만족한다. 정년 후라 하더라도 늘 공부하고 배우는 자세로 지내겠다. 앞으로 어려움이 있어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보단, 폭풍을 가르는 새와 대관령의 소나무처럼 잘 이겨내겠다”는 다짐으로 회고담의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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