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업 변호사의 법과 정치 (37)- 소영웅주의자들의 정의와 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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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업 변호사의 법과 정치 (37)- 소영웅주의자들의 정의와 오만
  • 강신업
  • 승인 2017.11.1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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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업 변호사, 정치평론가

소영웅주의(小英雄主義)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정의를 강조한 나머지 일반적 사유와 행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신은 정의롭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믿기 때문에 오만에 빠져 다른 사람을 쉽게 공격한다.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그들의 배타적 태도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관찰과 분석을 방해해 급기야 표현진실을 실체진실로 받아들이고 이를 행동의 근거로 삼게 만든다. 결국 소영웅주의자들은 불확실한 사실을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인양 선전하며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고 심지어 무고하기까지 한다. 더 우스운 것은 사실이 드러난 후에도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며 자신의 아집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영웅주의자들의 이런 류의 독선은 개인은 물론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그들이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믿음을 회의의 대상으로 객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들은 데카르트 (Descartes, René 1596~1650)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라고 하는 말이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 참 진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교훈임을 알아야 한다. 칸트(Immanuel Kant 1724~ 1804)가 이성의 자율적 사용을 강조하면서 이성비판을 철학의 법정에 올린 이유도 바로 과감하게 알기 위해서 열심히 따져보지 않으면 인간은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것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끝없이 회의하고 열심히 따져보며 살아야 우리는 비로소 독단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소영웅주의자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는 법의 준수에 대한 것이다. 소영웅주의자들은 자신들은 근본적으로 정의롭기 때문에 자신들이 설사 실정법을 어긴다고 해도 그것은 정의구현의 한 방법이어서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 BC 322)는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 ‘정의란 법을 지키며 이득과 손실에 있어서 마땅한 것 이상이나 이하를 가지지 않으려는 탁월한 품성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올바름은 법을 지키는 것이고 공정한 것이며, 올바르지 않음은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고 공정하지 않은 것’이라고도 하였다. 진정 바르다는 것은, 진정 정의롭다는 것은, 이득과 손실을 따지지 않고 법을 지키는 일임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누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소영웅주의자들이 놓치는 중요한 포인트는 인간의 삶은 대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울림’의 문제라는 것이다. 한줌의 흙과 흙이 모여 태산을 이루고 한 방울의 물과 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다수를 이룰 때 비로소 인간은 ‘동물’이 아닌 ‘인간’이 된다. ‘인간’이 모여 ‘사회’를 이룬다고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요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무리를 지어 살 때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의미다. 무리를 짓지 않는 인간은 그저 ‘동물’이거나 ‘신’일뿐 ‘인간’일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최선의 국가’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는데, 여기서 최선의 국가가 무엇인가라는 정치적 질문은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공동체를 통하지 않고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생각과 만나게 된다.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 행위를 통해서만 행복을 추구하는 ‘정치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요체다. 정치는 결국 무리지어 사는 인간이 어울림의 공동체를 이루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홀로 자신만의 정의에 빠져 법을 어기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며 혹세무민하는 소영웅주의자들은 그들의 행동이 인간과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개인의 정의가 한계를 갖는 것은 마치 우리가 효도한다고 하나 증삼(춘추시대 말기 노나라 출생, 공자의 제자 BC.505~BC.435)을 넘기 어렵고 우리가 겸손하다고 하나 허유(중국 고대의 현인 BC 2323추정~BC 2244)를 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소영웅주의는 사회를 해치는 거악이 되기 쉽다. 모름지기 경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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