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두 법조인의 죽음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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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두 법조인의 죽음을 보고
  • 이은경
  • 승인 2017.11.16 17: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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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

최근 들어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구체적으로 공표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무릇 수사는 과학적 방법에 의한 혐의입증에 주력해야지 피의사실 공표를 통한 여론몰이에 신경 쓰는 건 금기시하는 게 맞다. 그런데 ‘국정원 댓글 수사방해’ 사건에서 수사의 압박이 심했는지 두 법조인이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다.

물론, 자살을 두둔할 순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들은 우리의 선배, 후배, 동료였다. 혹여 거리낌 없는 공개수사가 지금의 사태를 불러온 건 아닌지, ‘피의사실공표죄’라는 법조문에 아예 눈을 감아 버린 수사관행 때문은 아닌지 마음이 영 착잡하다. 피의사실 공표행위에 대한 고소, 고발이 있더라도 기소를 하는 사례는 아예 없지 않은가. 이는 근본적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경시하는 풍조와도 맞닿아 있다.

헌법 제27조는 유죄판결 확정시까지 피의자, 피고인을 함부로 범인 취급하지 말라고 한다. 재판도 없이 사람을 쉽게 단죄할 수 없다는 인권보장사상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 형사법의 대원칙은 ‘피의사실공표죄’라는 형법 제126조를 통해 그 선명성이 드러난다. 수사기관 종사자가 공판청구 전,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것조차 법으로 처벌하니 말이다.

물론, 강호순 연쇄살인사건 이후 ‘범행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강력범죄사건’에 관해 약간의 예외를 인정하긴 했다. 그러나 수사기관의 피의사실 공표행위는 엄연한 형사처벌 대상이고, 수사과정에서 취득한 비밀을 엄수하는 건 아주 기본적인 의무다. 그런데 형법 제126조는 지금 현실에선 이미 죽은 지 오랜 조항인 듯 보인다. 법률은 최소한의 억제력도 잃었다.

헌법이 천명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은 99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라는 의미다. 형벌의 엄중함 역시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란 이름으로 불리는 그 어떠한 법집행도 이 형사법의 대원칙을 죽은 조문으로 만들면서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는 수사기관이 살아있는 권력, 바로 정치로부터 엄정한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와도 무관치 않다.

정치는 모든 게 국민의 뜻에 근거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정치 집단은 국민의 의사를 수용하는 걸 넘어 이를 선도해 나가려는 게 기본 생리일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정치세력이 언론을 내편으로 만들려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 수사기관이 조사 중인 사건, 그것도 정치적 이슈가 강한 사건을 수사하면서 조사의 결과인 공소 제기 전에 ‘법원’보다 ‘언론’을 먼저 찾아간다는 건, 법치국가에선 무척 우려스러운 일이다. 수사의 정당성을 ‘법원’보다 ‘여론’이 먼저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 여론이란 게 실은 정치의 역동성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무분별한 여론재판은 사법부의 독립마저 위태롭게 한다. 각종 인터넷 매체들이 사건마다 재판부 프로필을 공개하는 상황이다. 여론몰이를 통해 이미 결론을 만들어낸 후, 그와 다른 판단을 내린 판사들에겐 입에 올리기도 험한 댓글이 달리고 있다. 수사기관은 물론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명제 또한 여론의 세몰이에 묻혀버릴 수도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정치문화도 크게 후퇴시킨다. 법에 의한 처벌을 뛰어넘는, 인격말살에 이르는 이 여론몰이를 자제하지 않는 한 결국 정치는 사생결단의 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정치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알 것이다. 권력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그러니 권력을 유지하거나 쟁취하기 위해 더욱 더 여론을 장악하려 들 것이 뻔하지 않은가. 정치의 주도권이 뉴스 데스크에서 나온다면 두 발 뻗고 잠잘 수 있는 국민은 아마 없을 거다. 카메라는 도처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는 ‘법치’가 힘을 잃고, ‘인치’가 힘을 얻는 걸 뜻한다. 그러나, 역사는 법치의 후퇴가 우리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피의사실공표죄를 아예 폐지해 버릴 게 아니라면, 최소한 수사기관의 무분별한 피의사실 공표행위를 막는 가이드라인 하나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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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공정 2017-11-16 17:31:32
멋진 말씀이네요.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필력은 덤으로 배워갑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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