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9 / 서울민사지방법원과 형사지방법원의 분화와 김제형(金濟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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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9 / 서울민사지방법원과 형사지방법원의 분화와 김제형(金濟亨) 원장
  • 이시윤
  • 승인 2017.11.16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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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 대륙아주 고문변호사
전 감사원장, 전 헌법재판관

1. 서울지방법원의 약사(略史)

개화기 전의 구시대에는 권력분립이 없었기 때문에 재판전문기관이 행정기관과 따로 분리 설치되지 아니하였다. 서울 일원(一圓)의 재판 관할은 행정권을 총괄하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맡았다. 서울 일원의 전문재판기관이 신설된 것은 대한제국이 수립된 1895년으로 재판소구성법의 시행에 의한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부터이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에 의하여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총독부 재판소령이 새로 시행되며 지방법원을 제1심, 복심(覆審)법원을 제2심, 고등법원을 제3심으로 3심제가 정착되고, 재판소를 법원으로 개칭하여 서울일원관할의 경성지방법원이 생겼다. 이 법원에 소속된 판사를 ‘경성’의 ‘경(京)’자를 따서 경판(京判)이라 했다. 경판은 특수한 배경이 있지 않으면 고등문관시험이나 그 실무시험 때 우수한 성적을 낸 사람이 앉는 자리로서 엘리트 판사이기 때문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경성법원의 지방판사를 고향판사로 향판(鄕判)이라 하였던 것으로, 경판과 향판은 이때부터 구분하여 부르면서 향판이 그 지방 토호들과 유착한다는 말이 당시에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남한에 미군정이 들어서며 종전의 조선고등법원을 대법원, 복심법원을 공소원(控訴院)으로 바꾸었을 뿐 지방법원은 명칭을 유지하며, 서울 일원 관할은 경성지방법원이었다.

미군정의 과도기를 거쳐 1948년 8·15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법원조직법이 제정 시행되는 단계에서 경성지방법원이 서울지방법원으로 개칭이 되었다. 이러한 서울지방법원이 1961년 5·16 군사정변 후에 한때 서울민사지방법원과 형사법원으로 갈렸다가 군사정권이 물러간 뒤에 서울지방법원으로 복원되는 진통을 겪기도 하였다.

그 뒤 서울지방법원이 마치 빅뱅처럼 팽대해지면서 서울지방법원 본체는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되고 그 산하 동서남북의 4개 지원은 각 지방법원으로 승격되었다. 나아가 전문법원으로 서울지방법원에서 서울가정법원과 회생법원이 파생되기도 하였다.

팽창 일로의 서울지방법원을 견학차 방문한 일본의 소송법학자와 변호사회 간부들은 우리 법원을 돌아보고 놀라는 모습이었다. 동경지방재판소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인 것으로 알았는데, 서울법원이 더 큰 맘모스 법원이라는 것이다. 민사본안사건이 일본의 2배가 넘고, 숨긴 재산을 찾아내는 재산명시사건도 일본은 연간 1,000건이 넘지 않는데 한국에서 20만 건이라니 한국법원의 중추인 서울중앙지법의 활기에 아연할 뿐이라는 것이다. 특허침해사건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이 5개 고등법원 소재지의 지방법원과 더불어 선택적 중복관할권을 갖고 있어 사실상 특허 제1심법원의 몫도 겸한다.

이러한 서울지방법원의 역사 흐름 속에서 민사지방법원과 형사지방법원으로 분화된 과정과 그 와중의 인물인 김제형(金濟亨) 원장에 대하여 살피기로 한다.

2. 민·형사법원 분화의 계기

5·16 군사정변 후 최고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서울지방법원을 서울민사지방법원과 서울형사지방법원으로 분리·독립시킨 표면상의 이유는 재판의 전문화였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당시 서울지방법원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판사의 재판에 법원장이 불간섭하는 ‘사법권의 독립’만을 주장하므로 그를 법원장직에서 축출하기 위한 편법이었다고 한다.

사연인즉 5·16 군사정변이 있고 나서 2년간은 이전의 장면 정권 때와 같은 잦은 데모 등의 사회불안·소요사태가 없어져 잠잠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울대생이 국가재건최고회의 건물 주변을 말없이 돌기만 하는 ‘침묵’의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를 전기로 반독재투쟁이 서서히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당시 북의 김일성이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엿보는 시대상황에서 권력의 중추였던 중앙정보부는 직접 나서서 이 반독재투쟁에 나선 학생들을 반공법 위반으로 잡아들이기 위하여 서울지방법원에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절차를 밟았다. 아무리 군부독재의 시대였지만 법관의 영장 없이 사람을 잡아다가 바로 처형하는 공산권의 일인 독재까지 이르지는 아니하였고 법관영장주의를 존중하였던 것이다.

이에 서울지방법원의 당시 영장담당판사였던 이회창 판사를 비롯한 용기있는 판사들이 3연속으로 영장신청을 기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격노한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제사법위원장이었던 강기천 해병 중장은 서울지방법원 김제형 원장을 최고회의로 불러 판사들이 ‘혁명과업’에 비협조적이라고 질타했는데, (김 원장은) 사법권의 독립 때문에 법원장이 그 소속 판사의 재판에 간섭할 수 없는 것이라고 원론만을 강조하니, 상명하복의 군인세계에서 이를 이해해 줄 리 만무하였다. 이를 김제형 원장의 변명이라고 보고 그를 축출하기 위하여 우선 서울지방법원을 서울민사지방법원과 서울형사지방법원으로 갈라놓은 뒤 법원장 이상의 고위법관직의 보직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승인사항으로 법률을 바꾸었다.

그럼에도 바뀐 법에 따라 당시 조진만 대법원장이 김제형 원장을 서울민사지방법원장으로 보직천거하였으나 최고회의는 자신들의 취지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듯 단칼로 보직승인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대법원장은, 자신의 권한으로 임명할 수 있는 최고보직이 서울고법 수석부장 판사였기 때문에 여기에 보직하였으나 김 원장은 자퇴를 택하여 최고회의는 결국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 군사정권 시대에 사법권의 독립을 위협한 대표적 사례였다.

사람에게 자리를 주기 위하여 관직이나 기관을 새로 만들어 내는 ‘위인설관(爲人設官)’의 예는 흔하였지만 사람으로부터 자리를 빼앗기 위하여 그 기관을 없애는 이른바 ‘위인폐관(爲人廢官)’은 드문 예임에도 그러한 사례를 남기게 되었다. 그렇게 되어 서울지방법원은 1960년 초부터 서울민사·형사지방법원으로 30년간 분화되었지만 군사정권이 물러나면서 다시 ‘서울지방법원’으로 원상복구되었다.

3. 김제형 원장과 필자와의 인연
 

▲ 김제형 원장

그가 서울지방법원장일 때에 필자와 관련된 다른 이야기가 있다.
1962년 필자가 초임 판사 때의 일이다. 마침 즉결재판으로 단독재판을 담당하게 되었던 어느 날 즉결사건이 무려 500여 건이 몰려와 이를 속전속결로 처리해야 했다. 오전 재판을 끝낸 뒤 오후재판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개정하기에 앞서 입회서기로부터 중대한 시국사건이 즉결사건으로 들어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건의 내용인즉, 박정희 장군이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 약 2년이 지나기까지 잠잠하다가 갑자기 서울대 학생들이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건물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무언의 데모사건이 있었는데,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하였으나 당시 계속적으로 구속영장청구를 기각하는 사건이 있고난 뒤 이번에는 ‘군사정권 물러가라’는 전단을 통행이 많은 도로에서 뿌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서슬이 퍼런 중앙정보부였지만 이에 대하여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하여도 기각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는지, 어쩔 수 없이 이를 도로교통방해라는 죄목으로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엮어 즉결재판 사건에 부치게 되어 나에게 사건이 왔다는 것이었다.

즉결담당판사인 나에게 한 그 쪽 요구는, 구류로서 최고일수인 29일을 선고해 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일요일이고 어느 누구와도 상의할 상대가 없어 당시 서울지방법원장과 보고 겸 의논의 전화 통화를 하였다. 김 원장님께서는 힘들겠다고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며 사법권은 독립이니 이 판사가 소신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구류 29일은 대수롭지 않으니 군사정권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라는 취지가 아니었다.

이 말씀을 듣고 즉결재판 법정에 들어가니 법정 방청석에는 선글라스를 쓴 중앙정보부 직원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재판장을 직시하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신대로 도로교통방해죄의 법정형인 구류·과료 중 제일 약한 과료 500원의 형을 선택하여 선고하고 그 자리에서 피고인들을 풀어주었다. 피고인이 의외의 결과에 크게 놀라면서 감격하며 고마워하던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김제형 선생에게 꼭 이 사건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도 군부로부터 계속 미움을 산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법감독관으로서의 임무 소홀을 심하게 질책 당하였고 그때마다 사과하는 비굴함 없이 ‘사법부는 군대조직과 달라 상명하복 체제가 아님’을 누차 강조하였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사법권 독립 수호의 사표(師表)를 보이시다가, 결국에는 그 자리를 없애는 술수에 의해 서울지방법원장의 자리에서 축출을 당하였다. 자기 자랑을 모르시는 겸허한 성품 때문인지 반독재 투쟁의 대표 법조인이었건만, 세상이 바뀐 뒤에도 알리지 않은 탓에 선생의 사법권 수호에 대한 공을 알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지 아니한 것이 못내 아쉽다.

필자가 1970년 초 서울고법판사로서 대법원 사법제도개선심의위원회의 민사법 간사를 맡으면서 대한변호사협회 추천으로 위원이 되신 김제형 선생을 다시 모신 일이 있었다. 의안 심의과정에서 보인 참신한 아이디어와 정연한 논리·법리의 전개에 탄복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법조계에 이와 같은 천재도 있음을 발견하고 이분에게 뜻하는 바를 글로라도 남기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나는 말에는 자신이 있지만 글에는 자신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 삼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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