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35)-빈부 양극화 현상과 ‘새마을 운동’ -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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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35)-빈부 양극화 현상과 ‘새마을 운동’ -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 이유진
  • 승인 2017.10.24 12: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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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시간은 흘러서, 나이는 먹어가고 / 무슨 낙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 결혼도 연애도 집도 차도 내 몫은 아닌 듯한 밤 / ... / 대학 가면 빚더미, 난 평생 일개미 / 경쟁에 밀려, 시간에 치여 / 대학 가면 빚더미, 난 평생 일개미." - 아카펠라 그룹 원더풀의 ‘삼포세대’

요즘의 청년들은 지금까지의 청년들이 겪지 못한 방식의 새로운 절망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냥 ‘고생’이 아니라, ‘답이 없는 고생’이라는 점에서 동기부여도 되지 않는데 힘을 내야 합니다. 이에 비하면 1960-70년대의 고생이 나았다는 씁쓸한 탄식도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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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랑 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한 사랑노래>는 1960-70년대 시골에서 상경한 도시노동자의 애환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입니다. ‘이웃의 한 가난한 젊은이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달려 있죠. 이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청년들이 도시로 온 이유는 그만큼 농촌에는 성공의 가능성이 줄어들고, 도시에는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1966년과 1970년 사이 59개 개발도상국 중 경제성장률 1위, 수출 신장률 1위, 제조업 고용증가율 2위를 차지하며 국제적으로 그 성장을 인정받았습니다. 수출의 경우 1960년에 3280만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액이 1964년 1억 달러를 넘고, 1966년에 2억 5000만 달러가 되어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1962~66)에 연평균 44%의 높은 신장률을 나타냈습니다.1)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근현대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고도의 경제 성장이었죠.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수출제일주의, 급격한 공업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농수산업의 비중은 현저히 감소했고, 농촌 인구가 크게 줄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산업에서 고용기회가 확대되면서 도시로 나가는 농촌의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한국 자본주의의 빠른 성장에 필수적이었던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농산물 저가 정책과 양곡 수입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농가의 소득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도농(도시-농촌)의 소득격차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렇게 이농인구는 점차 늘어났지만 모든 이들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1960년대 말 도시 빈민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국가의 새로운 추진 사업인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도시 노동자의 저임금 체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도시 빈민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저임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식량증산정책과 ‘이중 곡가제(통일벼를 도입하여 쌀을 비싸게 사들이고 이를 도시 노동자들에게 싸게 파는 )’를 실시하였습니다.

이어 전반적인 농촌문제 개선을 위해 1970년부터 ‘새마을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습니다. 당시 농촌은 농한기마다 노름이나 음주 등으로 소일하는 ‘퇴폐적 정체’가 고질적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새마을 운동을 통해 지붕개량 사업이나 소득증대 활동 등으로 활기를 불어넣었죠.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 박정희 작사·작곡의 <새마을 노래>와 한운사 작사· 김희조 작곡의 <잘살아 보세>는 그 당시 아침에 잠까지 깨워가며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에서 불린 국가적 ‘민요’가 되었습니다.2) 이러한 정책으로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농가의 실질소득은 상당히 증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직도 도시 노동자의 가구 소득에는 훨씬 뒤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실질소득 기준으로 1974년을 제외하면 농가의 1인당 소득은 도시 노동자의 56~80%에 불과했습니다.3)

또한, 도시화와 공업화에 따라 공장·택지·도로 용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농지를 잠식하여 농업 환경은 점차 악화되었죠. 또한 통일벼 도입과 이중 곡가제 정책으로 농촌에서 쌀을 자급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보리가 상대적으로 적어지면서 이모작 체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벼는 상품으로 파는 데 비해 보리는 식량으로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벼만 생산하는 ‘미곡의 단작화’가 일어나면서 농촌에 다시 쌀이 부족해졌습니다. 이 정책은 마치 일제의 산미증식계획과 유사한 것이어서, 결국 농촌을 희생해서 공업화를 달성한 ‘식민지 농업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꼴이 되었습니다.

“전쟁 후 복구과정에서 발휘되기 시작한, 오랜 역사를 통해 양성된 민족적 저력이, 군벌과 재벌의 유착에 익숙해진 제국주의 일본군 출신이 아닌 다른 지도력에 의해 더 민주적 방향으로 분출되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이다.”라는 한 역사학자의 말은 이런 측면에서 깊이 새겨봐야 할 부분입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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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세기 우리역사, 강만길, 창비
2) 20세기 한국사 :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조희연, 역사비평사
3) 20세기 우리역사, 강만길, 창비
4) 20세기 우리역사, 강만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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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기사 2017-10-24 20:13:32
박정희는 탕탕혁명으로, 한강의 기적은 한강의 뻥으로 http://naver.me/xeYkgmz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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