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34)-4·19 혁명 이후의 사회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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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34)-4·19 혁명 이후의 사회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 이유진
  • 승인 2017.10.1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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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껍데기는 가라. /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 껍데기는 가라. /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 아사달 아사녀가 /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 부끄럼 빛내며 /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백두까지 /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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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우리나라 현실참여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껍데기는 가라>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껍데기’와 ‘쇠붙이’는 독재 정권과 제국주의, 그리고 분단을 포함한 모든 갈등을 의미합니다. 이와 대비되는 ‘알맹이’와 ‘동학년 곰나루의 아우성’, 그리고 ‘향그러운 흙가슴’은 4·19혁명과 불의에 항거했던 시민정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죠. 역사적으로 보면 4·19혁명 이후의 한국사회는 ‘껍데기’를 벗고 또 벗어야 하는 과정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껍데기들 중 하나가 5·16 군사 정변과 군부독재였고요.

이승만 정권은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자리를 잡은 정권이었습니다. 타민족의 강제지배에서 해방된 민족사회의 첫 정권은 대체로 민족 해방 운동 세력이 중심이 되기 마련이며, 그래야만 그 정권이 역사적 전통성을 지닌다는 한 역사학자의 말1)을 떠올려 볼 때,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 4·19 혁명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은 붕괴되었지만, 정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과도 정부가 구성되었고,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헌법을 개정하고 총선거를 실시하여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새로 국회가 구성되고 국회 내 선거에서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국무총리로 선출했습니다. 실질적인 수반이 장면이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장면 내각’이라고 부르는 제2공화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장면 내각의 수명은 짧았습니다. 장면 내각의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주로 지주세력, 가톨릭계의 종교계 인물 또는 일제 강점기 관료 출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시민들이 요구하는 친일파와 부정부패 척결, 민족 통일 문제 등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죠. 뿐만 아니라 당시 빠르게 성장한 군부를 제어하는 데도 실패했습니다. 당시 군 내부는 부패한 고위급 장성들과, 이들로 인해 진급이 늦어져 불만이 쌓인 영관급 장교들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시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와 이에 따른 혼란, 그리고 군 내부의 불만을 파악한 소장 박정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군부의 묵인 하에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정변 이후 박정희는 ‘민정이양’과 동시에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면서 군부독재를 연장시켰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두 가지 ‘껍데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민족적’, 그리고 ‘민주주의’이라는 허울이었죠. 냉전논리를 이용하여 ‘안보’를 기반으로 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시민들의 가장 큰 바람은 이승만 정권 아래 묵인되어 온 친일세력의 청산이었습니다. 이는 민족해방의 관점에서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지만, 일본의 만주 군관학교 출신인 박정희가 이를 수용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일본과의 외교 정상화에 대한 미국의 압박도 무시할 수 없었고요. 미국은 박정희의 5·16 정변을 묵인하는 대가로 한일협정 체결을 독촉하였습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김종필 · 오오히라 메모’를 통해 청구권 문제에 합의를 보고 한일 회담을 서둘러 타결하려 하였습니다.

야당과 종교, 문화 단체 대표 200여 명은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협정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대학생들도 침묵시위 등 반대시위를 치열하게 펼쳤습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은 성사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일본의 한반도 35년 강제 점령과 지배는 인정되지도 명기되지도 못했으며, 위안부와 강제징용에 관한 배상문제도 청구권 합의로 인해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반도 통일 후에 일본과의 조약이 단일화될 경우, 한일 협정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갈 문제를 남기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분히 ‘반민족적’인 행위였습니다.2)

‘민주주의’라는 말이 껍데기뿐이라는 것은 곧 드러났습니다. 박정희는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의 위기를 넘기면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독재체제를 연장하기 위해 3선 개헌을 강행하였습니다. 여당 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야당과 학생들의 반대를 탄압하면서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에서 야당의원들 몰래 여당의원만으로 3선 개헌안을 전격적으로 가결, 국민투표를 통해 이를 확정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비록 당선되지 못했지만 43.6%의 높은 득표율을 보였죠. 연이어 개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의 의석이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제 4선 개헌은 합법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대외적으로도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국이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기존의 냉전논리가 무너지지 시작했습니다. ‘안보’ 이데올로기로 독재체제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으로 평화 분위기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시에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곧이어 국회를 해산,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어 모든 대학을 휴교시키고 신문 · 통신에 대한 사전 검열제를 실시하는 ‘10월 유신’을 단행했죠. 뒤이어 ‘유신헌법’을 만들고 국민투표를 통해 이를 확정한 후 급조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를 통해 단독 출마하여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유신헌법’은 노동 3권의 제약을 제도화하고, 긴급조치권(계엄령을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내릴 수 있는 권리)을 두었으며,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대통령 선거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선제로 실시하고, 임기도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심지어 중임제한 조항도 없앰으로써 사실상 영구집권이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민주주의'는 기나긴 겨울을 맞아야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신동엽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껍데기’로 이루어진 커다란 ‘껍데기’였던 셈입니다. 시민들은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4·19혁명의 정신’으로 결집하여 싸웠습니다. 이러한 ‘4·19의 정신’은 1990년대 문민정부의 탄생과 현재의 ‘국민의 정부’ 창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의 어떤 ‘알맹이’보다 큰 결실이었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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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창비
2)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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