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156) - 비오는 날의 모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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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156) - 비오는 날의 모래밭
  • 차근욱
  • 승인 2017.10.1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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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공단기 강사

환절기가 되면서 바람이 쌀쌀해 지면, 시간이 빠르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아무리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더위도 결국은 끝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 Good News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쓸쓸하기도 하다. 시간이, 결국 세상 모든 것은 마지막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탓이다.

날이 쌀쌀해지면 아랫목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아늑함만큼 좋은 것이 없는데, 그럴 때면 묘하게 어린 시절 비 오던 날이 떠오른다. 비 오던 날, 집에 왔을 때의 안온함. 어머니가 활짝 웃으며 반겨 주셨던 그 평화로움이 이 험한 세상에서 적잖이 안심이 되어 준다.
 

어린 시절엔 비오는 날을 좋아했다. 비가 오면 처마 밑에서 우산을 쓰고 걷기도 했고 그저 하릴없이 동네를 걸어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비오는 날, 역시 가장 좋았던 것은 모래가 있는 곳이었다. 모래만 있다면야 학교 운동장이든, 공사판이든 가리지 않고 다 좋았다. 우산을 어깨에 껸 채로 쭈그리고 앉아 강을 만들고 댐을 만들고 마을을 만들며 놀았다.

내가 만든 강과 댐에 물이 흐를 때의 그 생동감. 살아있는 듯 한 물줄기의 흐름은 심장이 터질 만큼 나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고, 학교가 끝난 뒤 집으로 오던 길의 모래밭에 앉아 친구들과 한번 놀기 시작하면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살면서 그렇게 재미있던 시절이 또 있었을까. 비록 흙장난을 했다고 꾸중을 듣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비오는 날의 모래밭이라면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언제인지 모르게 비가 오는 날이라도 더는 모래밭에 들르지 않게 되었다. 아마 다른 재미있는 것이 생겼을 것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설렘을 잃는다. 가슴 뛰는 인생을 살라는 말이 폭력이 되는 이유다. 모든 게 신기하고 모든 게 재미있고 모든 게 맛있었던 시절은 그래서 더욱 아련하다.

이제 정말 가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 문득 비오는 날의 모래밭이 그리워졌다. 있는 그대로의 순간, 있는 그대로 행복할 수 있었던 시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이제야 알게 된 모양이지. 항상 행복을 멀리서 찾았다. 이걸 해내면, 저걸 갖게 되면, 무언가 하게 되면.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난 모래밭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마치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에 있었던 것과 같이. 결국 비오는 날 모래의 촉감을 한껏 느끼며 물길에 몰두하며 보냈던 행복보다 큰 것을 찾지 못한 것이다.

가끔 맨발로 야트막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흙과 돌의 느낌.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느낌은 분명 살아있다는 충실감과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모래를 만지듯, 그 순간을 만지는 발걸음이 행복했다. 멀리 돌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장난꾸러기가 되었다.

이젠 채우기보다 비우는 것이 더 마음 편하고 그럴 듯해 보이는 것보다 투박한 진심이 더 좋아 졌다. 아둔했지만 이제야 나는 조금 큰 모양인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그건 그렇고, 가을 날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은 청명함만으로도 눈을 호사스럽게 해줘 정말 좋구나. 겨울이 되기 전에 비가 내리면 그 땐 첨벙 첨벙 웅덩이에서 발장난이라도 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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