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6 / 근대재벌 민영휘의 성쇠와 그 가문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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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6 / 근대재벌 민영휘의 성쇠와 그 가문소송
  • 이시윤
  • 승인 2017.09.21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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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 대륙아주 고문변호사
전 감사원장, 전 헌법재판관

일제강점기에 우리 강토 최대의 부호는 민영휘(1852~1935)였다고 한다. 그는 1899년 조선에 처음으로 대한천일은행(→동일은행→상업은행→한일은행→한빛은행→우리은행)을 설립하는 한편 휘문의숙(휘문고등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고, 실인(室人)과 함께 풍문여의숙(지금의 풍문여자고등학교)도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말에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으면서 평안감사, 강화유수 등을 지내는 동안 권력형의 부 축재를 많이 하였다는 것으로 그것을 원동력으로 하여 재테크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던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가 남긴 재산은 추수한 곡식이 13만석, 당시의 화폐로 1,200여만 원에 이르렀으며 중국은행에만도 막대한 외화재산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 일시적으로 총 재산 4,000만원 정도의 대재벌이 되어 ‘가문의 영광’을 누렸다. 당시에 한반도는 5대 토지재벌이 있었으니 전라도의 김연수(전북 5만석+만주 10만석), 충청도의 김갑순, 영남의 문명기, 경기의 이회영(이시영 부통령의 형)과 더불어 민영휘가 10만석꾼에 속하였다. 이 중 이회영 선생만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뜻있게 돈을 썼다고 한다.

권력을 배경으로 한 축재였기 때문에 민비가 시해당한 후 그 세력이 한풀 꺾여 1909년에 피해자들로부터 9건에 이르는 소송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변호사들을 회유하여 수임을 거부하게 하는가 하면 그의 부정축재가 계속 신문보도되자 이를 덮기 위해 요사이 말로 ‘언론플레이’를 했다고 한다. 평양감사 시절에 그의 수탈로 아버지가 토지 20만 평을 빼앗긴 이갑이라는 사람이 절치부심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입학·졸업한 뒤 총을 들고 협박, 3만원의 배상금을 받아내면서 ‘이제부터는 돈을 교육사업에 쓸 것’을 약속 받았다 한다. 그것이 휘문의숙과 풍문여의숙을 설립한 동기인지 모른다.

그는 정실에 아들이 없어 입양을 시킨 양자 (민)형식이 있었으나 친생자를 얻기 위하여 다섯 측실을 두었는데, 그 중 다섯째 해주마마에게서 난 세 아들 대식, 천식, 규식이 있었다고 한다.
 

민영휘

한일 합병 후인 1915년 동일은행장에 취업하여 70세에 이르러 은퇴하였다. 1935년 84세로 타계하였는데 신문에 짤막한 단신의 사망기사가 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후에 엄청난 상속재산을 남겨 여기에서 형제의 난이 벌어졌다. 그것은 적양자 (민)형식과 대서장자 (민)대식 간에 공전의 대 소송이었다. 형식은 선비형이면서 일제기 법관양성소 소장을 지내기도 한 높은 지식인층(high-intellectual)의 사람으로, 매국노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에서 자금 제공자로 지목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1909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특별사면으로 복권되었다.

이 사건의 원고인 형식의 대리인은 김병로(후에 대법원장을 지냄)와 이인(후에 법무부장관을 지냄), 피고 대식의 대리인은 이승우 친일 변호사로 당대 대변호사가 선임되어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 당시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큰 소송의 인지대는 얼마인지, 또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작금의 이맹희 대 이건희 그리고 롯데 가의 (신)동주 대 (신)동빈의 선배 소송이라 하겠다.

옛날 권력을 세습하는 과정에서 칼부림의 혈풍이 일어났다면 근대에 들어와서는 큰 재산승계 과정에서 큰 소송이 남는데, 그 모델 케이스(model case)를 보여주는 셈이다. 그는 역사의 격동기에 기회 포착에 민감하여 한 때 갑신정변 때에는 중국의 원세개(위안스카이)를 불러들여 일본세력을 몰아냈지만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전한 뒤에는 반전하여 일본세력에 붙어 일본의 작위 받은 47명에 포함되어 자작 작위까지 받은 친일인사이기도 하다. 그는 갑신정변의 주역의 한 사람인 금능위(錦陵尉) 박영효에게 중구 필동에 있는 고루거각(지금 ‘코리아 하우스; 한국의 집’)을 기증하는 등 인심도 썼다고 한다.

그의 서장자 민대식은 적출자 (민)형식과 달리 매우 재리에 밝았던 사람으로 동일은행 은행장인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민영휘 사후에 민씨 왕국의 대통 승계자로 자처하면서 아버지의 재산 중 중요한 재산을 독식하다시피 하여 그것이 형식으로부터 위와 같은 큰 소송을 당한 원인도 되었다고 한다. 서울 경운동에 4,000여 평의 대저택을 짓고 살면서 성금이라는 이름으로 재산을 내놓는 친일행위를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소송은 증여와 같은 부의 독점을 완화시키는 기능도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의 셋째 아들인 민규식은 종로에서 그의 아버지 민영휘의 ‘영’자와 어머니의 ‘풍’자를 따서 이름을 붙여 세웠다는 종로 사거리의 영풍 빌딩에서(박흥식의 종로 화신 빌딩과 호각세) 부동산 매매와 임대업을 하면서 합명회사를 운영하며 세습 부를 누리다가 6·25 사변 때 이북에 납북되었다. 그 뒤 후손 대에 이르러 가정사가 복잡해지면서 골육상쟁의 소송을 많이 벌였다고 하며 근래에는 증여세 불복소송도 제기하였다고 한다.

특히 근래에 와 소송사건으로 화제가 된 것은 김홍도, 장승업의 그림 등 값진 고서화를 두고 민영휘의 증손 3명이 자기 계모 상대로 그에 대한 상속지분을 차지하려는 쟁투인데, 이를 두고 모 신문 2005년 6월 6일자는 ‘민영휘 후손들 가문의 위기’로 보도한 바 있다.

2005년에 이르러서 ‘친일재산 귀속법’이 제정되어 친일파의 친일행위로 취득한 재산이 국가로 귀속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되었다. 이승만 박사의 1949년 농지개혁으로 많은 농토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적지 않은 친일재산을 물려받은 민영휘의 4대손을 비롯해 64명이 이 법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 법은 민영휘가 재산을 취득할 당시에는 없었던 2005년 제정의 소급입법에 의하여 재산권을 박탈하는 것이니 헌법 제13조 제2항에 위반된다는 취지가 그 이유 하나이며, 또 하나는 후손 자신의 행위가 아닌 할아버지인 친족의 행위로 인한 불이익한 처우이므로 연좌제를 금지한 동법 제13조 제3항에 위반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헌법재판소 2011년 3월 31일 선고 헌바141 결정에서는 9명의 재판관 중 5대 4의 합헌 의견으로 이들이 제기한 헌법소원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다수의견의 요지는 친일재산 귀속조항은 소급입법에 속하지만 그러한 입법이라 하여도 국민이 소급입법을 예상할 수 있었던 경우와 같이 소급입법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에는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헌법의 소급입법금지 조항에 반하지 않는다는 판시였다. 국민정서를 헌법에 앞세운 의견인 것도 같다. 이에 4명 재판관의 반대의견 중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등 2명의 재판관은 헌법의 소급입법금지조항은 예외를 두지 않은 절대적 금지 명령이며 소급입법을 할 헌법적 근거가 없는 것이므로 헌법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하였다. 나머지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를 포함하여 (그는 이 한정위헌의견 때문에 헌재소장 국회청문회에서 곤혹을 치르다가 결국 낙마했다.) 2명 재판관의 반대의견은 ‘1904년 러일전쟁 개전 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취득한 재산을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으로 추정한다는 추정조항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100년 가까운 오래 전의 일인데 이제야 와서 친일행위에 의해 취득한 재산이 아니라는 증명책임을 그 후손에게 지우는 것은 불가능의 요구 같아 옳지 않고, 따라서 이 추정 규정은 가혹한 규정이니 그 범위에서 위헌이라는 한정위헌의 의견이었다.

그의 증손들이 헌법소송에서 패소되기 전에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던 것도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에 뒤따라 패소로 끝이 났다.

민영휘 재산은 1949년 이승만 박사의 농지개혁으로 많이 잃었음은 앞서 말한 바이지만, 위 헌법재판소의 합헌결정이 난 뒤에 그나마 남은 토지 36필지 50여 억원 상당이 모두 국가에 귀속되어 무상몰수에 이르렀다. 일제가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를 강점하기 전인 1904년 이전에 민영휘가 취득했던 재산까지 몰수에 포함되었는지는 모르나 이제 더 이상 그의 재산소송의 길은 어렵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마감된 것 같다.

민사소송이란 비용, 노력, 시간 그리고 스트레스 등 물심양면에서 지겨운 인생사이다. 민영휘와 그 자손이 4대에 걸쳐 대대적인 가내의 송사, 나아가 국가 상대 송사까지 영락없는 ‘소송 매니아’로 되었다 싶은 것은 돈, 특히 너무 많은 재산 때문이다. 돈은 소송건수와 비례적인 관계이며 돈이 많을수록 소송은 늘어난다. 그렇게 보면 재산이란 행복의 필요조건일지 모르나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 1가의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 민영휘가 처음으로 세운 민족 최초의 은행건물이라는 말이 유력하다.

민씨 가문에 큰 재산도 물려주었지만 결국 ‘실락원’으로 끝난 소송도 물려준 것이다. 민영휘의 자본은 산업자본이 아닌 토지 자본 및 금융 자본이었다. 자본의 축적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해도 돌이켜보면 그가 오늘 우리은행의 발전사에 일익을 담당한 것은 사실이다. 광교를 지나 을지로로 가는 대로변에 옛 천일은행, 동일은행 자리에 있는 서향의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 2층 건물이 그가 처음으로 세운 민족 최초의 은행건물이라는 말이 유력하다. 그럼에도 인터넷 공간이나 오늘의 우리은행 직원들이나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한 족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민씨 가문의 황혼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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