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32)-‘종전’이 아닌 ‘휴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 최인훈,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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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32)-‘종전’이 아닌 ‘휴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 최인훈, <광장>
  • 이유진
  • 승인 2017.09.18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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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1950년 9월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고 전쟁은 유엔군의 우세 속에 끝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을 기점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유엔군은 1.4후퇴를 하며 위기를 겪었습니다. 당시 유엔군의 전쟁 계획에는 비상수단으로 한국정부를 제주도로 이전시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1) 다시 유엔군의 반격으로 당시 38도선을 기준으로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고, 이로 인한 소모전이 장기화되자 미국과 중국, 북한은 1951년부터 휴전협상에 들어갔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이 전쟁을 통해 각각 상대방이 한반도에서의 전략적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확인하였으며, 냉전 구조의 균형을 파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협상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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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협상은 2년 동안 지지부진하게 지속되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군사분계선의 설정과 포로 송환 문제였습니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남과 북의 문제라기보다는 한반도의 해방시기부터 지속되어 온 미국과 소련의 세력권에 관한 문제이자,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문제였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쉽게 서로의 협상안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러는 동안 유엔군과 공산군은 계속 치열한 소모전을 치러야 했습니다. ‘고지전’라고도 불린 이 싸움은 하루에도 산간고지의 주인이 수십 번이나 바뀔 만큼 치열한 것이었는데, 합의과정에서 군사분계선을 ‘휴전 조인 당시 접촉선으로 확정한다.’고 합의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죠.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전략 전술적 위치를 확보하고자 각 진영은 총력전을 벌였고, 1953년 휴전 협정이 조인되기 직전까지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포로 송환 문제는 군사분계선보다 더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북측에는 한미 연합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 포로들이 있었고, 남한에는 중국군과 북한군이 중심이 된 공산군이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교환하는가가 협상의 핵심이었는데, 6.25 전쟁은 남북의 내전이라기보다는 국제 전쟁에 가까웠습니다. 따라서 전쟁에 참여한 각국의 입장이 우선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엔군은 유엔군 포로를 데려오는 게 가장 큰 관심거리였고, 중국군은 중국군 포로의 전원 석방이 우선순위였습니다.3) 전쟁터가 된 남한과 북한의 입장은 우선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논의 과정 끝에 포로 스스로 갈 곳을 선택하는 ‘자원송환의 원칙’이 정해졌지만, 이는 양측이 서로의 포로들을 더 뺏기지 않으려는 궁여지책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유엔 측과 공산군 측은 서로의 포로를 자기 측으로 끌어들이려 ‘설득’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이 때문에 협상은 더욱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주장이 대변되지 않은 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훈이 포로 송환 과정에서 중립국을 선택하는 장면은 당시 남북 포로 교환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네 사람의 공산군 장교와, 국민복을 입은 중공 대표가 한 사람, 합쳐서 다섯 명. 그들 앞에 가서, 걸음을 멈춘다. 앞에 앉은 장교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한다.
"동무, 앉으시오." / 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 "중립국." /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략] "동무의 심정도 잘 알겠소. 오랜 포로 생활에서, 제국주의자들의 간사한 꼬임수에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용서할 수 있소. 그런 염려는 하지 마시오. 공화국은 동무의 하찮은 잘못을 탓하기보다도, 동무가 조국과 인민에게 바친 충성을 더 높이 평가하오. 일체의 보복 행위는 없을 것을 약속하오. 동무는……"

"지식인일수록 불만이 많은 법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 몸을 없애 버리겠습니까? 종기가 났다고 말이지요. 당신 한 사람을 잃는 건, 무식한 사람 열을 잃은 것보다 더 큰 민족의 손실입니다. 당신은 아직 젊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나는 당신보다 나이를 약간 더 먹었다는 의미에서, 친구로서 충고하고 싶습니다.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서, 조국을 재건하는 일꾼이 돼주십시오. 낯선 땅에 가서 고생하느니, 그쪽이 당신 개인으로서도 행복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대단히 인상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뭐 어떻게 생각지 마십시오. 나는 동생처럼 여겨졌다는 말입니다. 만일 남한에 오는 경우에, 개인적인 조력을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 명준은 고개를 쳐들고, 반듯하게 된 천막 천장을 올려다본다. 한층 가락을 낮춘 목소리로 혼잣말 외듯 나직이 말할 것이다. / "중립국." / 설득 자는, 손에 들었던 연필 꼭지로, 테이블을 툭 치면서, 곁에 앉은 미군을 돌아볼 것이다. 미군은, 어깨를 추스르며, 눈을 찡긋 하고 웃겠지.

각각의 ‘정부’는 이 과정을 세력 강화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1953년 6월 이승만은 ‘반공포로석방’을 단행하며 미국을 압박했습니다. 미국은 조속히 협상을 마무리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상호 방위조약 요구에 관한 일부를 수용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승만은 이를 선전하여 대중의 지지를 확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구체적인 약속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휴전 이후 미국에 유리한 상호 방위 조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즉, 정식적으로 군사작전권이 이양되고 말았죠. 이것은 북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 역시 휴전 협상 과정에서 자기주장을 관철시킬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내정에 집중하여 수많은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빠르게 체제를 정비하여, 북한 내에서 자신의 독재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1953년 7월 7일에 소련과 중국 대표, 유엔군 사령관인 미국 대표가 함께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조인하였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죠. 1597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명나라는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 조선을 남과 북으로 나누려 하였습니다. 선조가 결사항전을 외쳤지만, 명나라에 군사지휘권을 줘버린 상황에서 조선의 주장은 제대로 관철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다행히 나라가 갈라지지 않았지만, 전쟁 이후 선조는 전쟁의 공로자들보다 자신과 몽진(왕의 피난길)하며 함께 도망친 대신들을 더 우대하며 자기세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1597년의 상황과 1951년의 상황을 보면서 이번에 우리 세대가 6.25 전쟁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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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현대사 교육총서3 6.25전쟁. 양영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 위의 책
3) 맨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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