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153) - 귀뚜라미 우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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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153) - 귀뚜라미 우는 밤
  • 차근욱
  • 승인 2017.09.18 18: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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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공단기 강사

가을이 왔구나, 라고 말하는 풍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선선한 바람이라던가 눈을 찌를 듯 시원하고 파란 하늘은 가을의 매력 그 자체인데, 개인적으로 가을의 아름다움 중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귀뚜라미 소리’이다.

‘가을’과 ‘소리’가 무슨 상관 이길래?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귀뚜라미 소리란 단순한 소리 이외에도 바람과 온도, 그리고 색과 냄새까지를 포함한다.

방 한 가운데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들을 방법은 없으니, 가을 귀뚜라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야외에 있거나 바깥과 맞닿은 문턱에라도 앉아 있어야지. 그리고 일몰. 노을이 하늘을 물들일 때, 어스름 드리워지는 땅거미 속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고요한 가운데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친다. 시간은 어둑어둑 하지만 아직 빛은 세상 만물의 실루엣을 신비롭게 매만진다. 숨을 죽이고 눈을 감은 채, 우두커니 멈춰 고요의 소리를 듣는다.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앉으면 이런 저런 생각이 나기도 하고 마음이 여려져 왠지 소년시절로 되돌아간다. 쉽게 상처받고 쉽게 상처주던 날들로. 너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왠지 쓸쓸하니 집 문턱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친다.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넘기는 책장 속에는 평화가 있다. 그리고 가을의 냄새. 바람에 실려 온 서늘하지만 충만한 내음.

이런 밤이라면 문턱에 앉아 먼 불빛에 의지해 끝도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아니라면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익숙하지만 노을빛으로 발해 낮설어진 길에서 상념에 빠져 정처 없이 걸어도 좋다. 하늘마저 쨍한 가을밤이라면 걷다가 멈춰 선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아도 좋을 테니.

학생시절 자주 걷던 길에는 은행나무가 지천이었다. 가을이면 샛 노랗게 물든 은행 잎 건너편 하늘에는 은하수가 있었다. 그 언덕길을 묵묵히 걷고 있노라면 귀뚜라미 소리가 나즈막히 들리곤 했는데, 그 시절에는 무언가에 늘 골이 나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귀뚜라미 소리를 떠올리면 철부지 시절, ‘나는 다 컸어!’ 라며 씩씩대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토요명화’. ‘토요명화’를 기억하는 분이시라면 Joaquín Rodrigo 의 ‘Concierto de Aranjuez: II. Adagio’도 기억하실 텐데, 프로그램 폐지 이후에 이젠 어느덧 음악만으로도 왠지 추억에 젖게 되었다. 지금이야 공중파에서도 영화에 자막을 입혀 방송하지만 그 예전의 토요명화에서는 더빙판 영화를 보여줬다. 혹시 운이 좋은 날에는 부모님이 치킨을 사 주시기도 했는데, 치킨을 먹으며 보는 토요명화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간혹 영어 좀 한다는 사람들은 영화를 보던 중 번역이 이상하다던가 더빙이 어색하다는 지적질을 하기도 했어서, ‘정말 그런가?’ 하는 마음에 외국어를 귀로 들으며 자막을 보는 사람들이 멋져 보여 나도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저렇게 틀린 것을 잡아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더 크고 나서는 차라리 더빙판 영화가 그리웠다.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는 잘난 머리보다는 그냥 영화를 마음으로 보는 편이 좋았으니까.

어쩌면 귀뚜라미 소리는 ‘향수’일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시절과 그리운 순간들에 대한 추억. 조금은 서툴렀지만 어수룩한 순수에 대한 갈망일지도, 아니면 평화롭고 행복했던 날들로 젖어드는 비밀의 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됐건, 가을날 만날 수 있는 귀뚜라미 소리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그리고 이 가을, 느긋하게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을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노을 따라 다녀온 산책 길 뒤,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다 하루를 마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지, 다시금 가슴은 꿈에 부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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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밥퍼 2017-10-05 12:54:15
5년쯤 뒤엔 꼭 그런 여유로운 생활이시기를... ^^ 마음 편하게 여행하시는 그런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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