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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 폭력성이 문제일까 매체가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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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 폭력성이 문제일까 매체가 문제일까?
  • 신희섭
  • 승인 2017.09.15 1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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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불광동에 사시는 외삼촌댁에 가족들이 놀러갔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흥은동에서 불광동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 의자사이를 오가면서 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버스안을 보니 가족들이 없었다. 부모님께서 동생들을 데리고 내릴 때 미처 나를 챙기지 못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미아가 되어 버렸다. 무서운 마음에 승객들과 기사아저씨에게 “우리엄마 못봤나요?”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걱정과 공포심 그리고 시간이 멈추었다. 버스가 거의 종점을 다다랐을 때 택시 한 대가 버스 앞에 멈췄다. 아버지가 내리신 것이다. 4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 아버지가 버스로 올라타시는 모습이 생생하다. 공포가 안도감으로 바뀔 때 빛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났다.

어릴 때 미아가 될 번한 기억은 끔찍하다. 빛이 존재하기 전에 어둠이 존재하듯이 시간 전체가 어둡고 그리고 두렵다. 그런데 부모가 된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에게 그 시간은 더욱 끔찍할 것 같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과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상실감이 부모를 공황상태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가 어릴수록 무력감은 더하다.

부모가 된 뒤에 잃어버리거나 잃어버릴 뻔한 아이이야기는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부모로서의 공감이 있다. 그런데 9월 11일에 인터넷에서 충격적인 기사가 올라왔다. 버스에 있던 한 승객이 특정 여성 카페에 제보를 올린 것이다. 그 제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버스에서 4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밀려서 떨어졌다. 그러나 버스는 이 사실을 모르고 출발을 했고 아이엄마는 울부짖었지만 버스 기사는 그대로 버스를 운행했다.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버스는 다음 정거장에 섰고 운전자는 엄마를 향해서 욕을 했다.”

이 제보는 인터넷에서 즉각적으로 어마어마한 공분을 샀다. 특히 여성카페의 엄마들은 버스 운전자에 대해 대대적으로 비난을 쏟아냈다. 버스 운전자를 처벌해 달라고 청와대에 청원까지 올라왔다.

필자 역시 기사를 접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하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런 큰 일이 있고난 뒤 경찰에 신고가 되었다거나 어떤 조치가 취해진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버스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을 것이고 만약 기사가 의도적으로 아이 엄마의 말을 묵살했다면 승객들이 기사에게 항의를 하고 실랑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추후 어떤 조치가 취해졌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이 이슈가 인터넷에서 파장이 커지자 서울시는 곧바로 버스 내부 CCTV 영상과 버스 외부 CCTV 영상의 조사에 들어갔다. 이후 서울시 조사는 반전이었다. 공개된 CCTV 외부 영상에서는 7살의 아이가 차에서 내린 뒤 버스 문이 닫혔다. 밀려서 떨어진 것도 아니었고 4살 아이도 아니었다. CCTV 내부 영상을 본 서울시 조사발표에 따르면 아이엄마는 아이와 거리가 떨어진 채 앉아있었고 아이가 내린 것을 인지하고 문을 열어달라고 한 것도 차가 출발한 뒤 10초 후였다. 버스 기사도 출발 후 10초 정도 엄마의 요구를 들었지만 정류장을 놓친 손님이라고 인지하였다는 것이다. 버스가 차선을 바꾸었기 때문에 기사는 안전상의 이유로 다음 정류장에 하차를 시켰다는 것이다. 영상이 공개되고 서울시의 발표가 나오자 여론은 역전이 되었다. 이야기를 과장해서 올린 목격자를 비난하고 아이를 돌보지 못한 엄마에 대한 ‘맘충’이라고 까지 욕설이 쏟아졌다.

어릴 적 버스에서 미아가 될 뻔한 경험이 있고 부모가 된 뒤 아이를 잃어버린다는 공포감과 무력감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이런 사태에 대해 충분히 공감을 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누가 문제의 중심인지가 아니다. 최초 제보자의 왜곡된 정보에 기초한 제보와 CCTV의 공개와 반전은 여성카페와 남성카페를 중심으로 상호 원색적인 비난을 주고 받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 상황을 보면 중요한 것은 인터넷 카페를 중심으로 한 증폭된 공격성이다.

인터넷 공간이 정보공유를 넘어서 집단적 공격성을 배양하는 공간이 되어 있다. 얼마 전 호식이 치킨 회장 사건에서 제보자가 꽃뱀으로 몰려 공격을 받았던 사건도 유사하다. 인터넷이 정보공유지를 넘어 집단감성공유지가 되고 있다.

공격성이 증폭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첫째, 온라인 공간의 특성을 들 수 있다. 인터넷 카페라는 공간이 특정 분야의 관심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정체성을 나누기 때문에 이질적인 의견을 가진 다양한 집단의 견해들을 공유하고 자신의 주장을 성찰하는 공간이 되기 보다는 ‘끼리끼리’문화의 동질화를 강화한다. 몇 몇 카페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여성비하나 남성비하가 대표적이다.

둘째, 인터넷이 주는 익명성과 함께 카페나 SNS라는 매체의 특성이다.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 공격성을 드러낸다는 점은 오래전부터 문제가 되어왔다. 또한 구어를 사용하고 짧은 글로 만들어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다는 점은 성찰을 어렵게 한다. 주장을 걸러내는 장치가 없는 것이다. SNS라는 사적인 네트워크는 이성보다는 감성 교류를 편하게 하기 때문에 매체가 매개장치가 되어 공격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특성은 공격적 행위의 본질은 아니다. 공격성이 증폭되는 과정을 설명할 뿐 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어느 정도의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공격성을 어떻게 표출하고 절제하는지가 중요하다. 교육과 사회화가 이런 공격성을 완화시켜주는 것이다. 문화 역시 이런 통제장치 중 하나다. 인터넷을 타고 확대되는 공격성은 가장 중립적이어야 하는 사법부의 판결에까지 미치고 있다. 사적 공간과 공적공간을 가리지 않고 감성을 동원하며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인민재판을 우려한다. 인민의 감성은 공적공간에서 촛불집회를 통해 탄핵을 이루었지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사적공간에서 인격살인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이다. 두 공간이 같은 이들인가에 의심을 가지게 하지만.

민중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구분이 어려운 것처럼 이 현상 역시 판단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권력을 추구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견제 받고 싶지 않은 권력추구가 카페라는 공간을 만나 공격성을 증폭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분노하는 사회는 공격하는 사회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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