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31)-‘통일’이라는 목적은 못 이루고, 결국 ‘시장 싸움’만 했던 6.25 전쟁- 구상, <초토의 시8 - 적군 묘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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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31)-‘통일’이라는 목적은 못 이루고, 결국 ‘시장 싸움’만 했던 6.25 전쟁- 구상, <초토의 시8 - 적군 묘지 앞에서>
  • 이유진
  • 승인 2017.09.12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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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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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里)면 / 가로막히고,
무주 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 미움으로 맺혔지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람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 구름은 무심히도 / 북(北)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 목놓아 버린다.

한 민족인 ‘적군(인민군)’의 시신을 수습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그 무덤을 바라보다 목놓아 울어버리는 군인.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곧 ‘나의 바람’이라는 말에서 이 전쟁이 얼마나 슬픈 전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6.25 전쟁은 왜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일제 식민 통치 아래에서도 똘똘 뭉쳐 살아남았던 한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고발하고 총을 쏘았던 이 비참한 전쟁의 목적은 바로 ‘통일’이었습니다. 누구를 위해, 어떤 통일을 하려고, 그 많은 피를 흘렸던 것일까요... 그리고 왜 아직도 우리는 분단국일까요.

1948년, 남북은 각각 단독 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와 북한의 김일성 정부는 모두 서로의 이념으로 통일을 이루고야 말겠다고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그 준비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는데, 북한 정부는 지원국인 소련으로부터 이미 전쟁과 관련된 각종 무기와 지침을 전달받은 상태였습니다. 이런 소련의 군사적 원조와 4월 중국 공산정권의 성립으로 북한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1)

반면 남한 정부와 미국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강도 높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했지만, 미국은 이를 경계하며 이승만을 ‘말썽꾼’ 혹은 ‘전쟁도발자’로 평가했습니다. 미국은 이승만이 더 강경한 태도로 북한과 공산진영을 자극할까봐 군대원조를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2) 또, 1950년 1월에는 미국 국무성장관인 애치슨이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미국이 설정한 ‘방위성’ 바깥의 국가들은 스스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타이완과 한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은 전쟁에 무방비 상태였고, 북한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영화 등을 통해 알게 된 한국전쟁의 대략적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1950년 북측의 우세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곧 미군을 필두로 하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하여 남북의 우세가 역전되죠. 이후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를 하게 되고, ‘고지전’과 같은 치열한 공방 끝에 3·8선을 기준으로 1953년 휴전협정을 맺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소련은 북한에 무기를 지원하는 등 간접 지원을 했고, 미국은 이 전쟁에 군을 동원해 ‘직접’ 개입했다는 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쟁 전에는 한반도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미국이 결국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시장’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죠. 1949년 중국이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 전역을 공산화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중국이라는 잠재적인 시장을 잃어버린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까지 공산화된다면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한국까지 ‘극동아시아’ 시장을 모두 잃어버리는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한 군대는 전쟁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서울을 내주고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고사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는 이승만 정부가 전쟁을 지휘할 능력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습니다. 결국 미군은 전쟁에 직접 개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을 재패했던 미군은 만약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쟁 물자는 가까운 일본에서 공수하겠다고 계획했습니다. 실제로 남북의 긴장이 격화되던 1949년과 1950년 사이에 미국은 일본 오키나와의 공군 기지를 확대하는 공사를 실시했고, 일본의 전범 기업들의 재산몰수를 중단했습니다. 실제로 전쟁을 치르는 동안 미군은 일본을 통해 원활히 군수물자를 공급받았고, 분하게도 일본은 덕분에 패전국에서 다시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었죠.

미국의 참전 덕분에 이승만 정부와 한국군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지만, 이때 미군에게 작전 이양권과 미군의 치외법권을 허용하면서, 우리는 독립국으로서 전쟁에 설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국군은 미군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었죠. 이는 휴전협상에서 남한 정부가 자연스럽게 배제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미군과 관련된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죠.

결국 6.25 전쟁은 목적했던 ‘통일’도 못 이루고, 우리 민족을 36년이나 억압했던 일본이 다시 세계 무대로 나아갈 기회만 준 ‘시장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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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전쟁, 베른트 슈퇴버 지음, 황은미 옮김, 한성훈 해체, 여문책
2) 한국 근현대사 산책 1950년대 1편, 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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