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5 / 호랑이와 호피(虎皮)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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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5 / 호랑이와 호피(虎皮) 판사
  • 이시윤
  • 승인 2017.09.0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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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 대륙아주 고문변호사
전 감사원장, 전 헌법재판관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호랑이는 동물원이나 가야 볼 수 있다. 그러나 1세기 전만 하여도 호랑이는 도처에 살아 인간에 대한 포식자로 실로 무서운 존재였다. 아이가 심하게 울면 ‘호랑이가 듣고 나타나 호랑이에게 물려간다’고 하거나 ‘호랑이 굴로 잡혀가도 정신차리면 살아날 수 있다’는 말까지 있었다.

지금의 서대문구 현저동 무악재 고개를 1세기 전만 하여도 ‘백명(百名)고개’라고 했다고 한다. 그 고개 양쪽은 인왕산으로, 그 숲 속에 잠복하여 사람을 노리는 포식자 호랑이의 먹이감이 되지 않으려면 한 명씩이 아니라 100명씩 뭉쳐서 떼를 지어 고개를 넘어야 안전하다고 해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는 것이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약자인 작은 새나 고기가 떼를 지어 다녀야 무서운 포식자들의 먹이감에서 방어가 되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약자는 집단방위(集團防衛)가 생존의 전략임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인 인조반정 때의 일이다. 김류와 더불어 반정의 주모자인 평산부사 이귀(李貴)가 반정의 선두에서 병사동원을 하면서 이를 속이기 위하여 ‘호랑이가 창궐하여 궁궐에까지 나타나 이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다.

1920년 함경북도 부령에서 일어난 일이다. 길이 2m 정도의 엄청나게 큰 호랑이를 포수가 총포로 쏘아 명중시켰는데 총을 맞은 호랑이가 한참 도망가다가 쓰러져 죽자 이를 본 두 사람이 주워 자기네 것이라고 가져갔다는 것이다. 포수가 알고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였으나 인도를 거부하여, 함경도 어느 재판소에 호랑이 인도 청구의 소를 두 사람 상대로 제기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 소송에서 사실관계의 진부를 가리기 위한 법정증인은 일본 경찰관이었다 한다. 신기한 소송이야기이기 때문에 당시에 신문보도가 나갔는데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는 보도가 없었다. 서울지방변호사회지에 실린 기사를 원용한 것이다. 사실관계가 이와 같다면 소송의 승패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독자 여러분도 한번 생각하기 바란다.

6·25 사변 전인가 후인가 한일 정상회담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수상 간의 회담이었다. 이 정상회담에서 덕담으로 요시다 수상이 이 박사 더러 “귀국에는 호랑이가 많다고 했었는데 지금도 그러한가” 물었다는 것이다. 이에 이 박사는 “임진왜란 때 귀국의 동군 사령관인 가토 기요마사가 모두 잡아가서 지금은 씨가 말랐다”고 해 과거 임진왜란의 침략사를 상기시켰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호랑이가 번성하다 보니까 호랑이 가죽도 인기 귀중품으로 널리 유통되었던 것이 과거사였던 것 같다. 여기에서 호랑이 가죽에 얽힌 이야기를 말해볼까 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총독 다음인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제2인자 정무총감(政務摠監)에게 호랑이 가죽을 준 사람이 있었다. 그 대가로 아들 판사자리를 얻어낸 큰 딜(deal)을 한 사람으로, 그가 유명한 공주의 김갑순이었다. 그는 당시 공주 군수의 첩실과 유착한 인연으로 군수의 직간접의 후원 하에 소택지 개간 등의 토지개발로 3,300만m²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공주에서 대전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토지대재벌이었던 것이나, 1949년 이승만 박사의 농지개혁실시로 많은 땅을 잃게 되고 한편으로 친일파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 호피판사의 아버지 김갑순

이 분은 전성시대인 일제 때 일본총독에게는 금송아지를 바치는가 하면 ‘금판 명함’을 갖고 다니면서 일제 고관들과 교제하였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정무총감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백두산 호랑이(?) 가죽을 바쳤다고 한다. 가죽을 받은 정무총감이 처음에는 대수로운 물건이 아닌 것으로 알아 그 부인이 넝마주이한테 팔아 넘기려 했는데 넝마주이가 ‘너무 귀한 물건이므로 자기 처지에서는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고 뜸을 들여 총감이 이를 바친 김갑순에게 무엇인가 보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총감이 김갑순을 불러 예의 금판명함을 들고가 만났더니 그가 고맙다고 하면서 소원이 있으면 하나쯤 들어주겠다고 하여 드디어 김갑순은 “아들이 있는데 판사를 좀 시켰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다.

정무총감의 자리에서 그것이 과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절차에서 하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판사 특별임명시험공고를 조선총독부 게시판에 보일듯 말듯 조그맣게 공고를 내면서 시험을 치렀는데 용케도 이를 보고 50명의 지원자가 몰려와 응시하여 지원자 전원을 합격시키는 파격적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김갑순의 아들이 판사로 임명되기에 이르렀는데 보직은 임명권자의 재량이므로 그를 당시 경성지방법원 판사(소위 京判)에 보하였다. 처음이라 판사의 말석인 합의부 배석판사가 되었는데 그가 주심으로 배당받은 사건의 판결문 작성에서부터 막히는 것이었다. 이 당시의 민사판결문은 이유만이 아니라 ‘사실 및 쟁점’까지 쓰게 하여 판결문 작성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리하여 돈도 있겠다, 돈으로 판결문 작성의 어려움을 해결하려 하였다고 한다.

자신이 소속된 합의부의 재판장이 일본인이었으면 당시 한반도 최첨단의 고급음식점으로서 최고 서양요리의 명소였던 조선호텔에 며칠 묵게 하며 융숭한 대접을 하고서 그에게 자기 주심사건의 판결문 작성을 의뢰하였고, 한국인이 재판장이었으면 장안의 초호화 조선요리점이고 팔도미인의 집합소이기도 한 명월관에서 며칠 호화파티를 해주고 판결문 작성을 맡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문이 안 날 리 없어 당시의 판사 보직권자인 조선총독부는 판사 한 사람만 배치되어 다른 판사가 없어 판결문 작성의 의뢰가 불가능한 오지 경상도 거창이나 함경도 갑산과 같은 단독지원으로 추방 아닌 전직을 시켰다. 그러자 그는 사건은 있는데 판결문 작성의 능력이 없고 그 작성을 의뢰할 사람도 없어 결국 양 당사자에게 화해를 권고하며 사건을 끝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판사의 판결문을 받아보겠다고 버티며 화해권고에 불응하는 당사자에 대하여는 관명거역죄를 운운하다가 그래도 버티는 경우는 자기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주고 괘씸하다며 사건을 끝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 가죽을 주고 판사가 되었다 하여 ‘호피판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그 뒤 이 호피판사는 판결문 작성의 능력부족으로 화해만을 권하는 판사였기 때문에 더 소문이 크게 났다. 그리하여 당시에 ‘판사 중에서 판결문을 쓸 실력이 없어 화해로만 끝내려는 판사는 이 호피 판사와 같다’ 하여 화해를 선호하는 판사는 ‘호피판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돈으로 벼슬을 산 인과응보의 대가이다. 일제 말에 이와 같은 희한한 사례가 있었고 그 소문이 크게 나서 해방 후 얼마동안은 화해를 좋아하는 판사에게 호피판사라는 별명이 붙을 것을 두려워 해 필자가 일선 판사 재직시절만 하더라도 판사들이 화해권고를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판사는 판결문으로만 말한다’ 하여 화해권고를 폄하하였다.

▲ 김용철 대법원장

그러나 1987년 김용철 대법원장이 화해와 같은 효력의 조정을 적극 장려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어 통일민사조정법이 시행되고 판결만이 능사가 아니라 대체적 분쟁해결수단인 ADR이 시대적 트렌드가 되면서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이제 화해권고결정, 조정회부, 나아가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 상임조정위원제도 등 판결이 아닌 화해가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게 되었다. 김 대법원장이 물꼬를 튼 후는 이제 실로 격세지감이 든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한 때 호피판사가 영화화된 일도 있으며 그 판사 아버지 김갑순의 과거사를 소재로 모 TV방송에서 연속드라마화 되어 인기를 끌었다. 그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아버지가 “민나 도로보(모두 도둑)”라고 자주 외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돈이 많이 있으니 도적과 같이 염치없이 덤벼드는 자들도 많았던 것 같다.

화해는 원래 나쁜 것이 아니다. 원·피고 서로 윈윈(win-win)하는 것이므로 장려할 일이다. 그러나 호피판사의 예처럼 사건내용도 파악하기 전에 화해로 끝내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다. 미국의 재판에 있어서 배심원 동원의 공관까지 가지 않고 화해로 끝내는 사건이 90% 이상이다. 처음부터 화해로 끝내려는 시도가 아니고 디스커버리(discovery)를 거쳐 증거가 전부 개시되어 사건 내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연후에 더 싸워보아야 결과가 달라질 수 없는 단계에서 화해(settlement)로 끝을 낸다면 이는 오히려 장려할 일이다.

화해에 옛 분들의 말이 있다. 원효대사는 ‘화쟁(和諍)이 좋다’,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일본과 실화(失和)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장개석(장제스)은 ‘공산당과 협상하지 말라’고 했다. 한편 “한국은 북과 대화가 안 먹힌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라는 트럼프의 요사이 말도 있다.

어떻든 김갑순이라는 분은 일제 강점기에 토지개발에는 획기적인 업적자였으나 아들의 개발에는 크게 악수(惡手)를 둔 것이다. 호피판사는 해방 후 변호사로서 국선변호인으로 나온 일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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