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30)'‘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지고 만 위대한 민족주의자 -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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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30)'‘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지고 만 위대한 민족주의자 -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
  • 이유진
  • 승인 2017.09.05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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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미국에 항복을 선언하였습니다. 모두가 기뻐해야 마땅한 날이었지만, 충칭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 손으로 이룬 해방이 아니라 미국 등 강대국의 힘으로 이루어진 해방이었기 때문이죠. 그들이 우려했듯, 해방과 함께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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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세력은 각자의 신념과 이해에 따라 세 집단으로 찢어졌습니다. 공산당에 가까운 박헌영 등이 속한 좌파 · 좌우 중립을 지키려는 여운형, 김규식 등의 중도파 · 미군정에 가까운 이승만을 위시로 한 우파가 그것이었죠. 이들은 해방정국 초기에는 국가건설을 위해 통일과 연합을 모색했지만 의견을 나누면 나눌수록 분열과 갈등만 깊어졌습니다. 서로의 지지기반과 이념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죠.

미군정은 공식적으로 좌우 세력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우파 세력을 양성하여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1) 해방 당시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는 좌우세력을 망라한 국민 대표 기관이었으나, 미군정이 이들의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을 부인하면서 세력이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었죠.

소련과 미국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각각에 기반을 둔 좌우세력의 갈등 또한 깊어져 갔습니다. 1945년 신탁통치 문제를 시작으로 1946년 3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고, 남한 내부에서는 미군정이 계속해서 공산당을 압박했습니다. 우파인 이승만은 1946년 6월 정읍 발언에서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한다’며 남북 단독정부 수립을 암시했습니다. 중도파가 좌우합작 운동을 펼치는 등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했으나, 급격히 증폭되어 가는 갈등을 해결하진 못했습니다.

1947년 미국이 소련에 대한 타협정책을 봉쇄정책으로 전환하면서 국내 문제의 해결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 이후 미국은 소련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UN)에 이관하였고, 11월 유엔 총회에서 ‘유엔 감시하의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가 결정되었습니다. 8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꾸려져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과는 협의가 되었지만 소련과 북한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에서는 미국이 제안한 ‘가능한 지역’, 즉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를 결정했고, 미군정은 남한의 단독선거 실시를 발표했습니다.2)

신탁통치문제에 반대의사를 공유했던 이승만과 김구도 여기서 갈라섰습니다. 김구는 ‘나의 소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었죠.

근래에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큰 이웃 나라의 연방(聯邦)에 편입(編入)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 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 밖에 볼 길이 없다.
일찍이 어느 민족 내에서나 혹은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하여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에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左右翼)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風波)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김구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통일 정부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신탁통치에는 반대했으나 북한과 원하는 방식의 타협을 할 수 없다면 남한 단독의 정부를 만드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위기를 느낀 김구는 김규식 등 중도세력과 함께, 단정수립을 반대하기 위해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과 연락을 취했습니다. 1948년 북한의 역제안으로 남북의 정당 지도자와 사회단체 대표자가 모두 참석하는 ‘남북한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가 평양에서 개최되었습니다. 4일간 치러진 이 회의는 김일성의 일방적인 진행으로 남한 대표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연석회의 후 김구, 김규식의 요청으로 김일성, 김두봉이 참석한 4자 회담이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김구는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주장했으나 북한측 역시 독자적 정부 수립의 욕구가 있었던 탓에 더 이상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로 제헌 의원이 선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분단체제’가 확고해지는 순간이었죠. 미·소 양국이 해방 초기에 임시적으로 정한 38선은 국경선이 되어 버렸고, 민족의 분단이 현실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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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근현대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협회, 한울 아카데미
2) 한국근현대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협회, 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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