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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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 노범석
  • 승인 2017.08.2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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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국사 노범석 교수의 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공무원 한국사>

조선의 궁궐은 살아 있다, 영화 <광해>와 <사도>에서 나오는 궁궐 이야기

 조선시대 임금이 고려의 만월대에서 연회를 열었다? 조선 초기인 태조~태종 때가 아니라면 있을 리가 없는 상황이지만 한국 사극에서는 심심치 않게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인 <역적>에서도 조선 국왕이 고려 만월대에 거주하고 있다.

▲ 드라마 <역적> 24화에 나온 연회 장면과 고려 만월대 터(우측 하단)

경사진 면에 축대를 높이 쌓고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한 것이 특징인 고려 궁궐은 조선의 궁궐보다 계단이 더 높게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드라마 <역적>을 방영하였던 방송사에서 만든 사극에서 항상 있어 온 일이다. 약 10년 전 드라마 <신돈>을 찍기 위해 만든 궁궐 세트장을 지금까지 그대로 재활용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충분한 제작비를 확보하기 힘든 한국 역사 드라마 제작 환경 상 기존 사극에서 썼던 소품을 시대 고증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계속 사용해오는 것이 거의 관례가 되었다시피 하다. 철로 된 갑옷 한 벌을 제작하는 데만 하더라도 수천만 원 수준인데 하물며 궁궐 세트장을 새로 조성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지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배경인데 고려 궁궐 세트장을 사용하다니. 차라리 실제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직접 촬영을 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드라마 촬영을 하였다손 치더라도 궁궐 고증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남아있는 조선 궁궐은 몇 백년 전의 궁궐에서 많은 부분이 바뀌어 있는 상태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창덕궁의 대전(왕의 침소)이자 편전(왕과 신하의 일상 업무 공간) 희정당. 현재 창덕궁 희정당은 실제로는 경복궁의 대전인 강녕전 건물이다. 1917년 창덕궁에서 대화재가 일어나 중요 건물들이 전소하자 총독부는 이제 사용하지 않는 경복궁 전각의 건물을 뜯어서 창덕궁 복원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때 경복궁의 강녕전은 창덕궁의 희정당으로, 경복궁의 중궁전(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은 창덕궁의 대조전을 복원하는 데 쓰였다.

한 가지 사례를 더 들자면 품계석이 있다. 궁궐의 외전(外殿)으로 공식 행사를 하거나 사신 접대 등의 의례를 시행하였던 전각인 정전에는 앞마당 가운뎃길 양 옆으로는 1품부터 9품까지 표시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조회를 볼 때 관리들을 품계별로 정렬하기 위해서 세운 품계석이다. 그런데 이 품계석은 조선 후기 정조 때 조성되었다. 따라서 영화 <광해>에서는 품계석이 나오면 안 된다. 세간에 고증이 잘 된 것으로 평가받은 영화 <사도>에서는 창덕궁 인정전 앞마당에 품계석이 없다.

▲ 영화 <광해>에 나온 품계석(좌)와 영화 <사도>의 창덕궁 인정전(우)

또한 사극에서 자주 벌어지는 고증 오류 중 하나가 국무회의를 별다른 이유 없이 궁궐의 정전에 ‘서서’ 진행하는 경우다. 궁궐의 메인 건물로 여겨지는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은 국왕과 신하의 국무회의 장소가 아니다. 경복궁의 사정전과 창덕궁의 선정전(조선 후기에는 희정당)에서 국왕과 신하가 ‘앉아’ 회의를 진행한다.

그런데 앞서 말했던 영화 <사도>에서는 창덕궁 인정전 앞의 품계석은 없애놓았으면서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국무 회의를 인정전에서 거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해당 장면은 약간의 창작이 가미된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실제 사료와 비교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영화 제작 시 굳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찍었던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 영화 <사도>의 국무회의 장면(좌)와 현재 창덕궁 희정당(우)

국무회의가 열리는 창덕궁의 편전은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선정전이었다. 그러나 인조 이후 창덕궁과 창경궁을 다시 복원하면서 조선은 국무회의를 선정전에서 하지 않고 대전으로 사용하였던 희정당에서 주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희정당은 1917년 대화재 이후 경복궁의 강녕전을 뜯어와 복원하면서 내부가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쪽마루에 카펫이 깔리고 창문에는 유리가 끼워졌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는 등 전형적인 서양식 실내 장식으로 꾸며졌다. 심지어는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현관도 설치되었다.

조선의 궁궐은 왕실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온 건물이기 때문에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항시 변해왔다. 20세기까지 조선 왕실의 후손이 계속 살아왔던 창덕궁이 서양식으로 꾸며진 것도 이상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조선이 망하기 전까지 조선의 궁궐은 말 그대로 살아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조선의 궁궐을 보러 가면서 우리들은 조선 후기 숙종의 로맨스와 영조와 정조가 고뇌한 모습을 떠올려보곤 하겠지만 눈앞에 보이는 전각들의 대부분은 20세기의 모습과 흔적이 상당 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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