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4 / 풍운의 조영래와 국제그룹 해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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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4 / 풍운의 조영래와 국제그룹 해체사건
  • 이시윤
  • 승인 2017.08.2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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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 대륙아주 고문변호사
전 감사원장, 전 헌법재판관

헌법재판소 초기에서 다룬 사건 가운데, 특히 잊혀지지 않는 대표적 두 사건 중 하나는 사립학교법 제55조의 사립학교 교원의 노동3권 금지 규정에 대한 위헌제청사건이다.(89헌가106) 전교조 측의 합헌투쟁의 사건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당시 정부(노태우정권) 여권만이 아니라 평민당, 교원노조 등 야측이 헌재의 재판에 비상한 촉각을 세우던 사건이기도 하다.

때문에 헌법재판소는 재소 후 처음으로 공개변론을 열었다. 당시 헌재 청사는 구 서울대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의 교사 자리였으므로 법정(法廷)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그 때 비상대책으로 사대부고의 체육 교습장을 개조하여 임시 법정을 만들어 공개변론을 열었다.

공개법정에는 위헌제청 신청인 측을 대표하여 이수호 전국교원노조위원장이, 정부 측으로는 당시 문교부 정원식 장관이 직접 법정출석하였다. 장관이 대리인 변호사를 시키지 않고 재판받기 위하여 법정 출석하는 예로, 일찍이 헌법재판소는 물론 일반 법원에도 없는 사법소송 초유의 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시간 반에 걸친 쌍방 공방전의 변론 끝에 잠깐 임시 휴정을 하고 다시 속개하여 약 4시간 가까운 법정변론이었다. 이렇게 열띤 변론도 드문 일이었다. 놀라운 것은 정 장관이 그 자리에 앉아 잠시의 휴정시간에도 화장실도 안가고 버티는 인내와 생리현상이었다. 이와 비슷한 일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건 때도 있었지만.

이 사건은 1989년 10월 13일 위헌제청하여 헌법재판소에서 2년 가까이 끌다가 1991년 7월 22일에 선고가 났다. 9인의 재판관 사이에서 색채가 비교적 선명히 났다.

6인의 다수의견은 학교 교원이 스승이라는 지위의 특수성에 비추어 노동3권을 제한하여도 위헌이 될 것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이에 대한 반대의견으로는 변정수, 김양균과 필자였다. 필자는 ‘사립학교 교원의 경우에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 행사의 제한은 합헌적 근거가 있으되 단결권까지 제한은 합헌적 근거가 없어 그 범위 내에서는 위헌’이라는 한정위헌 의견이었다. 김 재판관과 변 재판관은 각 이유를 달리하면서 이 노동3권 제한의 규정에 대하여 전면위헌 의견이었다. 그리하여 필자더러는 ‘온건 liberal’이라 했고, 김·변 재판관은 'liberal'이지만 변 재판관에 대해서는 극히 왼쪽이라 했다. 당시에 극히 오른쪽에는 C 재판관이 있어 대조를 이루었다.

문제의 사립학교법 제55조의 사립학교 교원의 노동권제한규정은 DJ정부가 들어서면서 전면폐기되었다. 헌법재판소의 합헌 다수의견이 전면 묵살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헌법재판소의 헌법수호자로서의 몫은 우리 국가사회에서 한낱 구호에 그치는 서글픔의 느낌을 받는다.

본고에서 좀 더 상세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하나인 국제그룹 해체사건이다. 이 사건 위헌 소송의 주도자는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으로 애석하게 요절한 변호사 조영래이다.

조영래에 대하여는 많은 정보와 책자가 있으므로(필자 저, 『민사소송법입문 -역사, 사례와 함께』, 355번 이하) 길게 이야기 할 것 없이 사건과 관계되는 한도에서 몇 마디 한다.
 

▲ (좌) 조영래 변호사의 생전 모습 / (우)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 앞에 설치된 조영래 변호사의 흉상

그는 나를 개인적으로 한 번, 업무상으로 한 번, 총 두 번을 찾았다. 한 번은 서울법대 교직을 그만두고 서울고등법원 법관으로 전직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이다. 그는 서울대 한일협정 반대 데모의 주도자로서 데모의 센터(center)를 서울 물리대에서 자기 소속의 서울법대로 옮기는 등 풍운의 활약가였다.(그는 서울대 전체 수석입학이었다.)

졸업한 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12기 재직 시였던 것 같다. 대학에서 사제지간의 인연으로 나를 찾아와 상담을 하길래 “너는 영웅감이어서 앞으로 험한 광야에서 뛰어야 할 처지라고 보는데, 제발 연수원 재학 중이라도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연수원 마치고 변호사 자격을 따면 당국에서 건드리기 쉽지 않은 방어막이 생기니 그 때까지는 제만사하고 공부에 전념할 것을 당부하였다. 자기도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옛 운동권 동지들이 연수생 봉급이 있는 것을 알고 자주 찾아오니 점심대접이 불가피하다는 등 고민이 있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보름 정도 지났을까 김대중 내란 예비 음모사건의 주모자로 일망타진 선에 올랐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는 1년 반인가 징역 살고 풀려나와 사법연수원도 복학이 안 되어 김흥한 변호사(한국 로펌의 원조격) 사무실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영어학습서를 내 공전의 히트를 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유신정권 말기에 재야운동권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며 그는 지하에 숨게 되었다. 그 때 정보부 측이 김 변호사에게 찾아와 조영래를 내놓으라고 독촉하여 심히 곤혹스러웠다고 했다. “그가 영어 학습서를 쓴 것으로 보아 반미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라고 확신한다”는 것이 김 변호사의 말이었다.

1979년 박대통령 시해 사건 후 ‘서울의 봄’이 오자 숨었던 지하에서 나와 사법연수원에 복원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그 후 인권변호사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부천경찰서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을 파헤치는가 하면 서울 마포구 망원동 집단 수해 피해자들의 집단구제에 나서면서 우리나라 집단 소송의 효시가 되었다.

그러던 그가 두 번째로 필자를 찾아온 것은 나의 사무실이 있는 헌법재판소였고 5공 시절의 국제그룹 해체사건의 청구인 대리인 자격에서다. 그는 전두환 정권이 물러가자 이 사건은 전형적인 헌법소송 대상임을 간파하고 89헌마31로 위헌소원을 제기한 것이었으며, 필자가 주심재판관이었기 때문에 업무상 찾은 것이다. 사건에 대하여 필자는 중립성을 해치는 심중을 토로할 수 없었지만 청구인 편에 동정은 가서, 조 변호사의 경기고 대선배인 조규광 소장을 만나 부탁하라고 시사했다. 그 때 조 변호사가 재판장인 소장을 찾아갔던 것인데 돌아와 매우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판장인 형편에서 중립성을 해치는 발언, 더구나 소송대리인에게 동정할 수 없는 일이어서 냉담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조 변호사는 계속 기침을 하는 것이었다. 건강 조심하라고 하니 감기가 오래 간다고 하면서 쓸쓸하게 내 방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승에서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폐암이 밝혀져서 이 사건은 또다른 인권변호사 황인철에 갔다가 그도 사망하여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건에서 크게 활동한 김평우 변호사에게로 인계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 변호사가 국제그룹 해체사건에 관하여 검찰수사기록 2,0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을 놓고 이 사건 소원심판청구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줄담배(chain smoke)를 불사했던 것도 병의 한 원인이 되었던 것 아닌가 본다. 결국 그는 89헌마31로서 1989년 초에 사건접수된 후로부터 4년 뒤인 1993년 7월 29일, 헌법재판소가 위헌선언을 내리도록 하는 성공을 이끌었지만 너무나 아쉽게 승소의 결과를 못 본 채 43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필자는 사건의 주심으로서 심혈을 기울여서 재판서를 작성하였다. 30년 가까운 법관 생활과정에서 이렇게 고되게 사건처리를 한 일이 없으며 과로로 입원까지 하였다. 헌법재판은 주로 1심이고 사실심인 동시에 헌법심이기 때문에, 3심이며 법률심인 대법원보다는 더 고되다. 양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뒤지지만 질은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 것이 헌법재판소이다.

결론은 대통령 전두환이 사기업인 국제그룹해체와 제3자 인수를 지시하고 그 실천을 당시 재무장관인 김만제가 행한 권력적 사실행위의 표본으로, 헌법상 법치국가의 원리와 기업활동의 자유 등을 침해한 것이기 때문에 위헌선언이 마땅하다 했다. 9인 재판관 중에서 7인이 위헌의견, 1인이 반대의견, 1인은 기권으로 침묵하였다. 1인의 반대의견은 제소기간의 도과로 각하결정 감이라는 것이다. 원래 이와 같은 권력적 사실행위에는 제소기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이지만, 받는다 하여도 헌법재판소가 개소하기에 바쁘게 제소한 이 사건의 특수성에 비추어 날짜는 계산상 지났어도 제소기간을 준수한 것으로 볼 예외적 사유에 해당한다는 것이 다수의견의 입장이었다.

이 사건에서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 대통령, 재무장관 기타 어떠한 권력도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판시했는데 당시 언론 매체들은 이 표현이 극적이었는지 크게 인용해가면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크게 받쳐주었다. 당시 야당의 박지원 대변인은 공식적으로 환영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는 있는 법. 당시의 실무 주역이었던 재무장관 김만제씨는 신문 인터뷰에서 “2년 뒤에 오판임이 명백해 질 것”이라고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며 단단히 별렀다.

국제그룹의 주채권자, 즉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의 행장은 재무부가 만들어 건넨 보도자료를 보고 그대로 발표하며 그 날에 비로소 국제그룹이 해체되고 한일합섬, 동국제강 등 제3자 기업인수가 되는 것을 알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된, 관치금융의 극치기도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해체 국제그룹의 오너인 양정모씨는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위헌선언을 바탕으로 잃어버린 기업들을 되찾기 위한 일반소송을 법원에 제기하였지만 일반 법원은 국제그룹해체의 위헌무효선언을 외면한 채 전 대통령의 해제조치를 기정사실화 하면서 그를 실망시켰다.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례에 의하면 헌법재판소의 주문 뿐 아니라 그 주요한 이유(tragende Entscheidungsgrűnde)도 존중해야 된다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일반 법원은 헌법재판소와는 따로 노는 양상의 상징적인 예가 되었다. 국회가 헌법재판소의 국가보안법상 고무찬양죄에 대한 한정합헌의 결정취지를 법의 개정으로 반영시킨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회는 존중하나 일반 법원은 잘 안 따르는 것이다.

만일 조영래가 죽지 않고 끝까지 일관하여 책임처리 하였다면 그가 일반 법원에서도 헌법재판소의 결론을 관철시켜 국제그룹해체를 원상회복시켰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조영래의 요절 때문에 국제그룹사건은 위헌의 선언적 의미에 그치고 원상회복의 매듭을 짓지 못한 미완성품이 된 셈이다. 풍운아로서 전두환이 만든 역사를 반쯤 되돌리기는 하였지만 명이 다하지 못해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한실의 부흥과 선주 유비의 뜻을 받들어 북벌의 꿈을 이루기 일보 전에 하늘이 그의 목숨을 거두어가서 허망하게 끝난 ‘오장원(五丈原)의 별’ 제갈량을 연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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