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8)-망국노(亡國奴), 나라 잃은 노예 - 이용악, <낡은 집>
상태바
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8)-망국노(亡國奴), 나라 잃은 노예 - 이용악, <낡은 집>
  • 이유진
  • 승인 2017.08.22 13: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이유진 강사와 공무원국어에 대해 더 깊이 공감하고 싶다면 이유진 강사 카페:http://cafe.daum.net/naraeyoujin/ZJpY/709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세요^^

날로 밤으로 /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 대대손손에 물려줄 / 은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굴소 /
모두 없어진 지 오랜 / 외양깐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 털보네 간 곳을 아무도 모른다 //
찻길이 놓이기 전 /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
털보의 셋째 아들은 / 나의 싸리말 동무는 / 이집 안방 짓두 광주리 옆에서 / 첫 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 그날 밤 /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
갓주지 이야기와 /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 노랑고양이 울어 울어 / 종시 잠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 나의 동무는 /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
그가 아홉살 되던 해 /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
더러는 오랑캐 쪽으로 갔으리라고 /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
이웃 늙은이들은 /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 탐스럽게 열던 살구 /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

위 시에 그려진 것처럼, 일제강점기 조선의 마을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낡은 집’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 땅이 없는 소작농들은 일본의 수탈과 지주의 수탈에 아기가 태어나도 반길 수가 없었습니다. ‘털보의 아들’, 화자의 동무는 결국 가족들과 국경을 넘어 척박한 간도나 연해주로 갔을 것입니다.

가난한 조선의 백성들이 살기 위해 갔던 간도 역시 대부분이 황무지여서 조선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피땀을 흘려도 굶주림을 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죠. 약 200여 년 간 버려진 땅이라 중국인들도 감히 개간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땅이었습니다.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과 유랑민들은 그런 척박한 곳에 정착촌을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괜찮은 땅에는 주인이 있었고, 주인 있는 땅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황무지를 잘 개간해서 겨우 농사를 지을 만해지면, 반드시 중국인들이 쳐들어와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정부가 없는 한국인들은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고, 이들은 뚜렷한 항의도 못하고 다시 쫓겨나야만 했죠. 당시 중국인들은 조선 유랑민들을 ‘망국노(亡國奴)’라고 불렀습니다. ‘나라 잃은 노예들’이라는 뜻이죠.1) 굶주림은 오히려 다행이었고, 중국인들과의 분쟁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도 독립 운동가들과 유랑민들은 정착촌 건설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1910년대 경성 최고의 부자였던 이시형, 이회영 형제는 가산을 모두 털어 서간도에 정착촌인 삼원보를 만들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습니다.2) 학교를 지은 독립 운동가들이 교사를 자처하여 문무일체의 교육을 하였습니다. 학생들은 교육과 더불어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농토도 개간하였습니다. 농사로 얻은 쌀은 내다 팔아 독립자금으로 활용했죠. 그러는 동안에도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때나 개간지를 차지하려는 중국인들은 횡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소규모의 독립군 부대들이 결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대들 중 대표적인 부대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첩자들을 통해 독립군 기지와 부대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첩보기록에는 당시 독립운동 모금에 대한 것부터 무기 수리 현황까지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북로군정서에 관한 보고서에는 ‘기관총 4정 중 2정은 고장 났는데 최근에 수리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3) 게다가 당시 일본군의 전력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동북아 최강’이었죠.

이런 일본군을 상대로 이뤄 낸 쾌거가 1920년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입니다. 일본군은 1920년대부터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만주를 침략하고자 했고, 이를 위한 사전작업으로 간도와 연해주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독립군 기지를 치고자 했습니다. 봉오동을 1차 목표로 선발대가 왔는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이를 물리친 것입니다. 이에 근처에 있던 일본군 본대가 움직였고, 이를 역으로 물리친 전투가 청산리 대첩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 등의 독립군이 연합하여 1,500여명이 이틀간의 전투에서 1,200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사살하고 2,20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습니다. 이에 비해 독립군 측은 전사자가 130여 명, 부상자 22여 명이었습니다.4)

후에 일본군이 보복으로 간도참변(경신참변, 1920)을 일으키면서 유랑민들과 독립군 부대들은 다시 떠돌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승리는 우리 민족에게 무장 독립 투쟁의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는 1930년대 한중 연합 작전과 1940년대 한국광복군 창설 등, 이후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해방 직전인 1945년까지도 일본은 끝까지 조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미국과 패전 협상을 할 때에도 조선과 ‘자발적인’ 병합을 하였다면서 한반도가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측은 ‘독립군의 격렬한 저항은 한국이 일본과 전혀 하나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는 증거’라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무수히 많은 유랑민들의 피땀이었던 간도와 연해주의 무장 투쟁은 결국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증거로 쓰인 것입니다.
-----------------------------------------------
1) 토큐멘터리 전쟁사, 국방tv
2) 신흥무관학교, 주동욱, 삼인
3) 토큐멘터리 전쟁사, 국방tv
4)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한국 근현대사 학회, 한울 아카데미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