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3 / 헌법재판소와 헌법소송의 초기사 (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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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3 / 헌법재판소와 헌법소송의 초기사 (속편)
  • 이시윤
  • 승인 2017.08.10 15: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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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 대륙아주 고문변호사
전 감사원장, 전 헌법재판관

(전편에 이어...)

불기소처분을 헌법소원의 대상으로 하였던 제1기 재판부의 판례를 후기 재판부가 뒤집은 것은 앞서 본 바이나, 검사들은 이것을 보고 크게 안도의 숨을 쉬었으리라 생각한다. 초기의 헌법재판소의 판례집을 보면 검사의 불기소처분에 관한 사건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인데, 이제 없어졌으니 말이다.
제1기 재판부에서 필자가 주심을 맡았거나 깊게 관여한 중요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나간다.

1. 88헌마1 법률소원사건

이 사건은 헌법재판소의 제1기 재판부에 처음 접수된 사건이다, 헌법재판소에서 사건번호를 붙임에 있어서 위헌법률심판제청사건을 ‘헌가’로, 헌법소원심판청구사건 중 당사자가 헌법재판소에 직소한 사건(헌재법 68조1항)은 ‘헌마’, 법원에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했다가 기각되어 헌법재판소에 제소한 사건(헌재법 68조2항)은 ‘헌바’로 하기로 하였다. 이 사건은 헌법소원청구를 법원을 거치지 않고 직소한 사건이므로 ‘헌마’의 사건번호가 붙을 수밖에 없었고 1988년 9월 말에 출범한 헌법재판소에 접수된 첫 스타트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번호가 ‘88헌마1’로 붙여졌다. 필자가 법관 재직 중에 헌법재판소에 뽑혀온 유일의 상임재판관임을 감안하였는지 헌법재판소 조규광 소장께서 필자를 주심으로 사건배정을 하였다. 검토하여 보니 사법서사법 제4조가 위헌이라는 취지이나 이치에 맞지 않아 배척될 사건임이 분명하였던 것으로, 동료재판관은 “탄원서감의 사건을 놓고 빨리 정리하지 않는다”고 비판이다. 그러나 쟁점 법률 자체가 위헌이라는 결론을 낼 수 없지만 법률도 공권력의 행사결과이므로 그로 인하여 기본권 침해가 있고 청구인 자신의 직접성, 자기관련성, 현재성 등 헌법소원의 요건을 갖추면 헌법소원의 대상적격이 있다는 판례를 낼 기회라고 보았다. 법령에 대하여는 그 자체로는 일반민사소송이나 행정소송으로 유무효를 다툴 수 없는 이상 이에 의한 구제가 허용되지 아니하며, 보충성 원칙의 예외로 천상 헌법소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냈다.

이 결정문이 1989년 3월 17일에 나갔는데 도하신문에서 이를 무게있게 다루었다. K모 헌법학자가 신문기사를 보고 결정문을 보내줄 것을 부탁하여 두려울 것 없이 응하였다. 긴장은 하였지만 별 비판이 없어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 판례는 의미가 컸다. 헌법소원제도 처분소원, 부작위 위헌소원 외에 제3유형으로 법률소원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법률의 위헌여부를 심판해 달라는 제청을 하며 법원을 거쳐서 헌법재판소에 오게 하는 간접루트만이 아니라, 법원을 통하지 않고 직접 헌법재판소에 법률의 위헌여부심판청구의 길을 열었다는 것으로 그 의미가 또 다른 것이었다. 법원이 법률에 대한 위헌심판제청을 하는 등 움직여 주어야 헌법재판소에 법률의 위헌여부심판을 하게 되는 헌법재판소의 법원 의존성을 탈피하여 이제 독립 입지의 길이 개척된 셈이다.

2. 헌법재판소의 특이한 주문, 88헌가13

국토이용관리법 제31조의2 등에 관하여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이 행한 위헌제청신청사건에서 있었다. 당시 국토이용관리법(지금은 법명이 바뀌었다.)은 토지 투기지역의 토지거래에 있어서는 주무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토지거래허가제에 의하여 되어 있는데, 이 허가제에 대한 위헌성이 쟁점이 되는 한편 허가위반이나 사위의 방법으로 허가를 받은 경우는 동법 제31조의2에서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취하는 형사처벌규정 부분이 문제되었다. “토지거래허가제를 위반한 토지거래는 사법상 무효(유동적 무효)가 됨을 규정하였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나아가 형벌법규로 징역 또는 벌금형으로 처벌함은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반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러한 위헌의견이 재판관 9인 중 5인으로, 과반수는 되었으나 헌법에 명시규정한 6인의 위헌정족수에는 미달하였다. 그리하여 위헌선언을 할 수는 없고 또 위헌의견이 과반수에 달하는 상태에서 헌법에 위반하지 않는다고 주문표시를 하는 것도 부적절하였다.

일찍이 독일헌법재판소가 ‘의료과오소송에서 과실의 증명책임을 가해자인 의사에게 전환시킨 통상대법원(BGH) 판결에 대한 헌법소원’에서 8인 재판부의 ‘위헌4:합헌4’ 의견대립으로 무판결을 했다는 말도 있어 이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고민을 하다가, 결국 우리는 국토이용관리법 제31조의2 형벌 규정은 ‘헌법에 위반한다고 선언할 수 없다’고 본다는 특이하고 창의적인 주문표시를 했다. 헌법재판관 과반의 위헌의견이지만 정족수미달로 위헌선언까지는 못간다는 늬앙스를 풍겨 뒤에 입법자가 이 조항에 대하여 입법개선을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다른 나라와 달리 위헌선언이 재판관의 단순과반수가 아니고 2/3 이상의 가중과반수인 특수성에 비추어 합헌·위헌 외에 과반수 위헌이면서 2/3 미달일 때는 이 같은 제3유형의 주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아 이러한 창의적 주문표시를 했다. 그러나 후기재판관이 그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한 채 이러한 경우도 단순 합헌주문을 내는 것으로 우리가 만든 판례를 뒤집은 것은 매우 유감이다.

3. 헌법재판소의 대법원과의 마찰 사례

헌법재판소의 제1기 재판부는 대법원과 반목 마찰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것은 독일에 있어서도 정도차이는 있었으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지금의 광화문 바로 뒤에 자리잡았던 일제 조선총독부건물(YS 때 허물었음)은 독일제국대법원(Reichsgericht)과 세계적으로 건축시장의 쌍벽이었다. 금자탑의 큰 건물을 청사로 한 이 독일 제국대법원의 전통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독일 통상대법원(BGH)이 초기의 헌법재판소와 위상다툼이 있었다 한다. 헌법재판소의 판결·결정이 법원을 비롯한 일반국가기관을 기속하는 법규적 효력이 있기 때문에(우리 헌법재판소법에도 같은 규정) 일반법원과 국회, 행정부가 헌재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어 그 대립이 둔화되었다는 것인데, 심한 기관이기주의 풍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유난했다. 대표적인 몇가지를 본다.

(1) 89헌마1 사법서사법 시행규칙의 입법부작위사건

“사법서사(지금의 법무사)법에 그 자격을 법원, 검찰 일반직의 경력자 이외에 시험합격자에게도 부여하도록 규정하였고, 그 구체적인 시험선발 절차는 대법원규칙인 사법서사법 시행규칙에 시험시행규정을 두게 하였는데 이를 두고 있지 아니하니, 이는 상위법인 사법서사법에 의하여 부여된 사법서사 자격취득의 기회를 시행규칙인 하위법에서 박탈하는 것이어서 평등권과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위헌문제가 대두되었다. 이 사건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결정이 난다는 소식이 대법원에 알려지며 대법원에서 난리가 난 것이다. 주심이 변정수 상임재판관이었는데 이 분은 대법원이 사건로비한다고 대노하며, 대법원장 지명의 헌법재판관들이 위헌의 평의결과를 누설한 책임이 있다고 보고 형사상 공무상 비밀누설죄 등으로 고발한다며 고발장을 써갖고 헌법재판소장실에 찾아가 항의부터 하는 것이었다. 한참 항의 중에 필자도 소장실에 들렀는데 공교롭게도 이 때에 이일규 대법원장이 전화가 와서 통화를 청한다고 소장비서실에서 전언을 하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변 재판관이 직접 목격하여 더욱 흥분하는 것이었다. 대법원장 지명의 재판관 중 한 사람인 필자에까지 위헌 평의결과를 누설한 혐의를 두는 것 같아 마음이 유쾌할 수 없었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한 선고 연기신청을 냈고, 연기되면 대법원 사법서사법 시행규칙에 시험절차를 규정하는 방향으로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이 사건 선고기일은 1990년 10월 15일로 잡혔는데 대법원측의 연기신청이 들어와 선고연기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필자는 선고기일의 연기는 재판장의 직권사항이니 재판장인 소장이 알아서 처리할 문제라고 하였으나 소장은 비상임재판관까지 불러서 이 문제를 평의에 회부하는 것이었다. 평의결과는 연기 ‘찬성4:반대4’로 동수였으니 이제 재판장인 소장에 캐스팅보트가 가게 되었는데, 소장이 결정을 미루며 주저하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국회 4선 의원이었고 법제사법위원장까지 지낸 한모 재판관이 소장의 호인 ‘우성’을 부르면서 “만일 연기한다면 이 합의실의 재떨이를 던질 수밖에 없다”고 일갈하니 그 때 비로소 소장은 예정대로 선고하기로 결정을 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예정대로 위헌결정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데 대법원의 위상에 큰 타격을 입힌 것이었다. 위 결정으로 대법원은 어쩔 수 없이 시행규정을 만들었다. 형사고발, 재떨이 소외 변, 한모 재판관의 개인적인 처신 자체에는 동조할 수 없었으나 두 분의 역동적인 헌법수호의 의지는 두고 높이 평가 할 일이다. 이 위헌결정을 계기로 사법서사(법무사) 시험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이제 법무사시험 합격자가 법원, 검찰의 경력출신자 수를 압도할 단계라는 것으로, 법무사단체 단체장 자리도 시험 출신의 무대가 되어간다니 이분들은 제1기 헌법재판소에 고마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문제로 대법원장 지명의 필자는 “의리없다”는 평을 들은 것은 사실이나 후회는 하지 않았다. 다만 대법관 출신의 이모 재판관은 유일의 위헌반대 의견서를 냈다. 이 사건에서 적극 역할을 한 변정수 재판관은 재야 인권 변호사 출신, 한모 재판관은 정치인 출신이다. 제1기 재판관은 구성의 다양성이 긍정적으로 표출된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2) 89헌마160 사죄광고위헌소원사건

민법 제764조는 명예훼손의 경우에 명예회복의 한 방법으로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을 명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여기에 사죄광고를 포함시켜 그 광고를 게재토록 명한 것은 위헌이 된다는 한정위헌의 결정을 냈다. 필자가 이 사건의 주심이 되었는데 명예훼손사실의 취소판결은 별문제이나, 신문 등 언론에 사죄광고를 내도록 명하는 것은 ‘양심도 아닌 것을 양심인 것처럼 표현할 것의 국가적 강제’이므로 정신적 기본권의 하나인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 하며 위헌선언을 한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전원일치로 사죄광고판결이 위헌이 된다고 한 결정은 대법원에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 같다. 헌법재판소가 비록 따로 있지만 대법원도 합헌판결이 가능한 체재 하에서 대법원이 합헌이라 한 지 얼마 안되어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으로 뒤집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에 난리가 나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 대하여 법원이 무효선언을 한다’고 보도자료를 내는 등 정면 충돌할 기세였다. 이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주심재판관인 필자로서 우선 대법관들을 전화설득하고자 하였으나 당시의 이회창 대법관 이외는 평소 친분이 돈독한 분마저 냉담한 반응이었다. 대법원장 지명의 재판관인 처지라서 당시의 K모 대법원장을 찾아가 물의를 일으켜 유감이라는 뜻을 표하였다. 선진국의 통설과 판례의 경향을 따랐다는 것과 지금부터 30여년 전에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간신히 합헌의 과반수에 이르렀으니, 그 때보다 정신적 기본권을 더 강조하는 시대정신에 비추어 위헌결정이 과히 무리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K대법원장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라고 하며 끝내 노여움을 풀지 아니하였다.

이 헌재결정으로 신문에 사죄광고 내는 판결집행은 종지부를 찍었으나 L모 대법원장 때에는 사법서사 시행규칙 사건으로, K모 대법원장 때에는 사죄광고게재의 위헌결정으로 대법원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하니 대법원의 헌법재판소에 대한 반격의 응어리가 서서히 쌓여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나아가 제1기 재판부의 두고 기억할 중요사건으로는 날치기 국회법안 사건에 대한 현장검증사건, 국가보안법의 고무찬양죄에 대한 한정합헌사건, 국제그룹해체에 대한 위헌선언사건 등을 열거할 수 있는데, 설명이 길어질 수밖에 없어 뒤에 별도로 해설코자 한다. 이들 사건에서 보인 초기 헌법재판소의 활약상은 자화자찬일지 모르나 긍정적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었다.

다만 초기 헌법재판소에서 소수의견을 낸 재판관의 전속연구관이 거의 연속적이다시피 야당 성향의 언론에 비판논조의 글을 내는가 하면 연구부장을 지낸 법관이 헌법재판소 평가절하의 필봉을 드는 등 재판관 자신 뿐만 아니라 지원팀까지도 좀 소란스러웠던 것이 헌재 초기사의 1면이었다. 독일형 재판소임에 비추어 조규광 소장은 노령임에도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필자도 어렵지만 슐라이히(Schleich) 등 독일 헌법관계서를 읽었던 것이 기억에 새롭다. 초기사의 참고문헌으로는 이범준(경향신문 법조팀장)의 ‘헌법재판소, 한국현대사를 말하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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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 2017-08-10 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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