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5)-코레아 우라! - 안중근, <장부가(丈夫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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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5)-코레아 우라! - 안중근, <장부가(丈夫歌)>
  • 이유진
  • 승인 2017.08.0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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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 이유진 강사와 공무원국어에 대해 더 깊이 공감하고 싶다면 이유진 강사 카페:http://cafe.daum.net/naraeyoujin/ZJpY/709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세요^^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대장부 세상 살아감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들도다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천하를 바라보니 어느 날 업을 이룰까
東風漸寒兮 壯士義熱 동풍 점차 차가워지나 장사의 의기는 더욱 뜨겁도다
忿慨一去兮 必成目的 분개한 마음으로 한 번 나서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라
鼠竊○○兮 豈肯比命 좀도둑 伊藤(이토오) 어찌 목숨이라 할 수 있을까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어찌 이에 이를 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본디 그러하다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 大韓同胞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굳은 마음으로 안중근 의사가 이 시를 쓴 지 3일 뒤, 러시아 하얼빈 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들어왔습니다. 기차에서 내린 이토가 몇 걸음 걸었을까. 환영인파 속에서 ‘탕’하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이어 2발의 총성이 더 울려 퍼지고, 러시아 헌병들이 허겁지겁 범인을 잡았습니다. 범인은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친 뒤 순순히 체포되었습니다.

안중근은 일본의 범죄자이자 대한 제국 민중들의 의사(義士)였습니다. 당시 중국의 원세개[袁世凱)] 또한 안중근의 의사의 의거를 듣고 다음 글을 지어 찬양하였습니다.

平生營事只今畢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死地圖生非丈夫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 장부가 아니고말고
身在三韓名萬國 몸은 한국에 있어도 세계에 이름 떨쳤소
生無百世死千秋 살아선 백 살이 없는데 죽어서 천 년을 가오리다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읍에서 태어났습니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나 공부보다는 사냥하기를 더욱 좋아하여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합니다. 농민전쟁에 참여했다가 패한 김구가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의 호의로 그 집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열여섯이던 장남 안중근의 사격 솜씨가 백발백중이었다고 말한 것이 전하기도 합니다.1)

가톨릭교를 받아들인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으로 프랑스 인 빌레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는데, 이 때 ‘토마’라는 세례명을 얻었죠. ‘도마 안중근’의 ‘도마’는 이 세례명을 한국식으로 발음한 것입니다. 그는 빌레헴 신부와 함께 황해도 일대를 돌며 전교 활동을 할 정도로 믿음이 깊은 신자였습니다. 그는 조선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천주교 대학을 세우는 것을 계획하였는데, 당시 한국 천주교 주교였던 뮈텔 주교가 조선인의 교육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크게 실망한 안중근이 외세에 기대지 않고 민족을 지키려는 강한 민족관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죠.2)

교육을 통해 백성을 일깨우고,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 안중근은 이후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07년의 고종의 퇴위, 그리고 군대해산을 바라보며 계몽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여러 의병 전쟁을 지켜보며 현재 조선 의병의 무력함을 깨달았죠.3) 이에 해외로 나아가 의병조직을 세우고 무장투쟁을 할 것을 결심하고 1907년 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습니다.

1908년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을 시작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함경도 경흥과 회령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곧 패퇴하여 가까스로 살아남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되돌아왔습니다. 이에 의병조직을 더 정비하여 장기적 투쟁을 하기 위해 ‘단지(斷指)회’를 결성하였죠. 단지회는 훗날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세력을 결집하는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단지회 결성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을 방문한다는 소실을 들은 안중근은 이를 기회라 여기고 이토를 저격하였던 것입니다.

러시아는 일본과 마찰이 일어날까 두려워 당일 오후 일본 영사관에 재빨리 안중근 의사를 넘겼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방에서 1차 조사를 받은 뒤, 뤼순 감옥으로 옮겨졌고 곧 재판이 열렸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재판이었죠. 일본인 검사는 억지스러운 증언으로 안중근을 힐책하였지만, 그는 시종 의연하고 논리적이었으며 당당한 태도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결국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어이없게도, 당시 순종은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흉악한 역도에게 화를 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놀랍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중략) 안중근은 나라와 백성을 해치는 흉악범입니다.”라고 하였고, 죽은 이토에게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와 함께 거금 10만원을 부조했습니다.4) 이미 나라가 일본에 의해 기울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안중근은 자신이 죽은 뒤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주고 독립이 되면 고국으로 옮겨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당시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뤼순 감옥 사형장 근처가 현재 아파트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그의 유해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대로 하얼빈 의거가 100년이 되던 2009년, 안 의사의 동상이 ‘안중근’ 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부천시 중동공원에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낯선 땅 아파트 아래 잠들어 있을 안중근의 정신을 동상을 바라보며 기릴 수밖에 없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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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20. 망국, 박시백, 휴머니스트
2) 안중근 평전, 김상웅, 시대의 창
3) 위의 책
4) 시로 쓰는 한국 근대사1, 신현수, 작은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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