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2 / 헌법재판소와 헌법소송의 초기사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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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2 / 헌법재판소와 헌법소송의 초기사 (전편)
  • 이시윤
  • 승인 2017.07.26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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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 대륙아주 고문변호사
전 감사원장, 전 헌법재판관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와 헌법소송의 초기사 (전편)

원래 재판은 범죄에 대한 응징인 형벌을 주는 형사재판(‘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주는 타리오)에서 시작, 뒤이어 생명·재산에 대한 피해에 배상금을 물리는 민사재판이 생겨났다. 이렇게 민형사재판 중심에서 헌법재판소가 생긴 것은, 1803년 미국의 Marbury v. Madison사건에서 미국 최고재판소인 Supreme Court가 ‘국회가 만든 법률이라도 국가의 최고 통치규범인 헌법에 맞지 않으면 법률을 무효화‘ 시키는 판결을 내면서이다. John Marshall은 당시에 최고재판소장으로서, 그가 관여재판관의 전원 일치로 법률의 위헌판결을 한 것이 헌법재판의 효시이다.

유럽에서 처음 헌법재판소가 생긴 것은 미국에서보다 약 100년 뒤인 1920년대의 오스트리아였다. Hans Kelsen이라는 유명한 법학자가 "국가통치이념을 밝힌 최고 규범인 헌법에 일치하도록 법률·명령·규칙이 만들어져야 하며, 여기에 맞지 아니한 법률 등은 헌법재판소에 제소하여 위헌무효의 판결을 받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오스트리아에 처음 헌법재판소가 생겨났다. 대통령3, 국회3, 대법원3 등 우리나라가 모델로 한 9人조 재판부이다.

독일에서 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가 생긴 것은 제2차 대전 이후의 일이다. 히틀러의 무소불위의 독재는 사법권이 취약하여 그 견제기능을 못한 것도 원인 중 하나라고 보고, 사법권의 강화를 통해 독재자의 재등장을 막으려는 반성적 차원이었다. 미국의 Supreme Court를 그대로 도입하기 보다는 전문성을 선호하는 독일 민족성답게 헌법재판 전담의 헌법재판소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생긴 독일 헌법재판소의 성공적이고 발전적인 모델은 영미법계를 제외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확산되어 세계 80여 개의 국가가 대법원과 별도로 최고재판소를 설치하고 있다.

제2공화국(장면정권)에서 헌법재판소의 설치가 논의되었지만, 5.16 군사정변 후 이 논의를 접고 유명무실의 헌법위원회를 둔 상태에서 법원에 위헌법률심사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대법원이 국가배상법상 이중배상금지규정에 위헌 판결을 하면서 큰 홍역을 치르고 난 뒤 대법원으로부터 정치문제에 사법 개입을 꺼리는 직간접의 의사표시가 있었고, 그 대안으로 1987년 개헌 시에 독일형 헌법재판소가 우리 헌법에 도입되게 되었음을 본지 7월 14일자에 밝힌바 있다.

1987년 개헌의 주역이 노태우 대통령이기 때문에, 헌법재판소의 신설은 노 전대통령의 대표 업적으로도 평가한다. 그는 대통령 재직 시에 우리들 9인의 헌법재판관을 청와대 오찬에 초청하며 격려해 주었고, 당시 그를 ‘물태우’라고 일컫는 세평이 잘못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도 들었다.

개정한 헌법에 따라 헌법재판소의 신설을 위해 헌법재판소법의 제정에 착수한 것은 좋은데, 이 과정에서 헌법소원제도가 새 헌법에 의하여 생겼다는 것을 대법원에서 알게 되었고, 그렇게 되면 법원의 재판이 헌법소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에 대법원은 크게 당황하였다. 이것은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의 재판을 재심사하는 사태로 발전하게 되어 대법원 위에 헌법재판소가 군림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대법원의 위상에 결정타가 될 ‘큰일’이었다. 대법원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헌법재판소법에서 ‘헌법소원에서 재판 배제의 예외’를 관철시켰다.

이것은 헌법재판소법 제정과정에서 큰 쟁점이 되었던 것으로, 이 문제가 클로즈업 되자 여기에 몰입하느라 헌법재판소법이 좀 더 다듬어질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헌법학자들은 독일의 예에 비추어 대법원의 태도에 불만이 있었다. 이 때 대법원은 헌법재판소의 신설 개헌을 방치 혹은 무관심했던 것에 대해 후회했을 것이다.

이렇게 제정과정에서 큰 홍역을 치르면서 헌법재판소법은 1988년 8월 5일 제정 공포되었으며, 그 시행일은 9월 1일로 잡았다. 그러나 9월 1일에 설치 출범했어야 할 신설 헌법재판소에 대하여 당시 법조계·언론계·정부 당국이 모두 망각한 채 그 날짜를 넘겼다. 9월 초 어느 언론기관에서 알고는 이를 질타하는 특종기사를 보도했고, 비로소 정부당국이 크게 당황하여 그때부터 설치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만큼 헌법재판소는 국민은 물론 정부도 관심 밖에 둔 무게 없는 기관으로 첫 출범한 것이다.

상임재판관 6명(조규광 소장, 서울고검 검사장인 김양균, 전 4선 국회의원 한병채, 재야변호사 변정수, 수원지방법원장 이시윤, 재야변호사 김문희)과 비상임재판관(재야변호사 최광률과 김진우, 전 대법관 이성렬)을 인선하여 대통령이 임명장을 주며 헌법대로 9인 구성의 헌법재판소가 법 시행 한참 뒤인 1988년 9월 18일에 시작하게 되었다. 헌법재판소의 청사는 구 헌법위원회가 사용하던 서울 중구 정동의 법조회관 12층, 단 한 층의 사무실이었다. 과거 헌법위원회 위원장이 쓰던 방은 상임 재판관 5인이 함께 사용하고, 상임위원이 쓰던 방은 재판소장실로 하였다. 간판은 빌딩 정면이 아니라 12층 엘리베이터 맞은 편에, 벽에 붙은 나무 판자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새 청사 임대 예산은 미리 마련되어 있어, 임대 건물을 물색한다는 소문을 들었던 대한법무사협회가 열심히 그 회관 건물에 입주를 교섭하여, 소장을 비롯한 상임재판관들의 동의 하에 거의 성공 단계에 들어섰으나 필자가 유일하게 제동을 걸었다. 이에 조 소장은 ‘이시윤 재판소가 아니다’라고 필자를 심히 질타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타협책으로 사법대서사 회관(전부가 아닌 4층 내지 7층)의 현장 검증을 위해 소장과 상임재판관에게 가보자고 제의하여 다 같이 갔다. ‘외국 최고재판소장인 헌법재판소장이 예방할 곳이 되느냐, 이 좁은 방에 법정을 만들어서 헌법재판의 공개변론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겠냐’ 등의 문제제기에 그제서야 사법서사 회관입주 계획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일부 상임재판관은 “길거리에서도 어느 법률에 대하여 합헌이면 합헌, 위헌이면 위헌 선언을 하면 되는 것이고, 장소는 무슨 문제냐”의 논법을 내 놓았지만, 나는 ‘형식이 실질을, 양이 질을 결정한다’는 확신이 있어 끝까지 반대하며 소신을 폈다.

그 뒤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당시 국무총리인 이현재 박사가, 김용태 서울 특별시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특별지시로 서울사대부속 고등학교 교사건물 전체를 독립 청사로 확보하여 주어 헌법재판소는 독립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따라서 헌법재판소에 대한 1차 공로가 노태우 전 대통령이라면, 2차 공신은 이현재 전 총리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헌법재판소가 급작스럽게 생겨나면서 기존의 최고 재판기관인 대법원과의 평화공존관계는 원만할 수가 없었다. 법원에 의한 견제로, 법원에 의한 위헌법률심판제청사건은 이미 할 수밖에 없었다. 헌법재판소가 개점 휴업의 구 헌법위원회 판박이로 양로원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가 엄습했던 것도 사실이다. ‘태어나서는 안 되는 사생아적 기관’, ‘다음 개헌 때는 손 보아야 할 기관’으로 폄하하는가 하면, ‘대법관이라는 용이 되려다가 만 이무기의 집합’, ‘헌법재판감각 없이 민형사재판 하던 아류’라는 모욕적 언사가 나오는가 하면, 또 헌법재판소가 헌법위원회의 재판(再版)임을 시사하듯이 재판관 면전에서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위원’이라고 거듭 호칭하는 자도 있었다. 이렇듯 냉소적인 모멸감에서 필자는 53세밖에 안 되어 더 일할 나이에 양로원 소속 신세가 되는 것을 개탄해야 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쓰레기통에서도 장미가 필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으며 그것이 역사적 당위라고 생각하였다. 상임재판관들이 단합하여 아는 변호사를 통해 당시 악법으로 정평이 난 보호감호처분이 담긴 사회보호법을 헌법재판소에 사건 유치시키는데 성공하였고, 그에 대해 위헌결론을 냈다. 상임재판관 전원이 산골짜기의 요새지에 설치된 청송보호감호소에서 현장검증을 해보았다. 한 평짜리의 감방에 7명이 수용되어 가로로 눕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극한의 인권 잔혹사였다.

재판은 헌법소원에서 배제되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여도, 검사의 불기소 처분이 헌법소원의 대상이 된다면 헌법재판소가 사건 없는 한적한 기관임을 면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이론적 뒷받침이 문제였다. 선진국 헌법재판소의 판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파견 헌법연구 부장법관에게 시켜보니 냉담한 반응이었고, 스스로 고심하다 보니까 헌법 제27조 제5항에 형사피해자의 공판절차에서의 진술권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검사가 제마음대로 형사고소사건 등에서 불기소처분을 하는 것은, 제대로 기소처분을 했을 때 법관에 의한 공판절차에서 형사피해자가 진술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버리는 기본권침해의 문제가 생긴다는 것에 착안하였다. 이렇게 되면 헌법소원의 대상적격이 있다는 이론적인 구성이 된다고 보았다.

드디어 검사의 불기소처분에 대해 헌법소원을 할 수 있다는 판례가 헌법재판소에서 나가면서 이제 불기소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사건이 늘어나, 헌법재판소는 사건없는 ‘별 볼 일 없는’ 기관이 아닌 실질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검찰에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 같다. 법원의 재판은 헌법재판에서 배제되는데, 검찰의 불기소처분은 왜 잡느냐고 볼멘 불만이 나왔던 것이다. ‘불기소처분이 헌법소원의 대상이 됨은 무소불위의 검찰권 남용에 큰 견제작용이 된다’고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한 기사가 조선일보의 사회면 톱기사로 나갔다. 헌법재판소가 허수아비 기관이 아님을 실감한 검찰은 이에 격노하며, 책임 취재한 K 기자를 불러 그 취재원을 대라고, 헌법재판소의 어느 재판관이 이론 구성을 했는지 아느냐며 밝힐 것을 요구했다 한다. 이에 K 기자는 “취재원에 대한 예의 묵비권을 행사하다 보니까, 어찌된 일인지 자기가 사회부에서 쫓겨나 경제부로 전출되었다”고 하며, 저녁에 필자를 찾아와 “이제 출세는 끝났다”고 눈물의 하소연을 하던 일이 어제 같은데, 어언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렇게 고심 끝에 이룬 불기소처분에 대한 합헌적 통제는 막강한 검찰권 남용을 막기 위한 제1기 재판부의 큰 성과였지만, 이것이 뒤에 헌법소원 대상에서 배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불기소처분까지 헌법재판소가 관장하는 것은 그 큰 위상에 걸맞지 않는다고 하며 미련을 갖지 않았고, 법원의 재정신청제도가 특수범죄에서 일반 범죄로 확대 개편된 마당에 법원에 맡길 문제라고 가볍게 보고 손을 뗐다는 것이다. 군병사 ‘얼차려’ 폭행사건에서 일찍이 제1기 재판부가 낸 판례대로 겨우 기소유예처분만 헌법소원의 대상으로 남겼다고 한다. 어렵사리 이룬 제1기 재판부의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은 허망감이 든다. 법원의 재판소원이 배제된 것처럼, 검찰은 그 불기소처분이 헌법소원에서 배제되게 되었으니 실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소송은 그 시발점에서부터 이렇게 축소지향적으로, 위력이 없는 것으로 나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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