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합, ‘유통前 기수’ 인정한 기존 판례 변경
[법률저널=안혜성 기자] 주식회사의 대표이사가 대표권을 남용해 회사 명의의 약속어음을 발행한 사안에서 배임죄의 기수 여부에 관한 대법원의 입장이 변경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20일 “주식회사의 대표이사가 임무에 위배해 회사 명의로 약속어음을 발행한 경우 그 약속어음의 발행행위가 무효이고 그 약속어음이 제3자에게 유통되지도 않은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회사에 현실적인 손해가 발생하거나 재산상 실해 발생의 위험이 초래됐다고 볼 수 없으므로 이 경우 배임죄의 기수범이 아니라 배임미수죄로만 처벌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는 종전 대법원의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기존 판례는 “회사의 대표이사가 임무에 위배해 회사 명의로 의무부담행위를 한 경우 그 행위가 유효하면 회사의 채무가 발생하므로 그 채무가 현실적으로 이행되기 전이라도 배임죄의 기수가 성립하는 반명 그 의무부담행위가 법률상 무효인 경우에는 배임죄의 재산상 손해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배임죄의 기수가 성립되지 않는다”면서도 약속어음에 대해서는 달리 판단했다.
약속어음의 경우 발행행위가 무효이더라도 ‘그 약속어음이 제3자에게 유통되지 아니한다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재산상 실해 발생의 위험이 초래됐고 따라서 배임죄의 기수에 해당한다는 것이 종전 대법원의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대법원 다수 의견은 “회사의 대표이사가 임무에 위배해 회사 명의로 약속어음을 발행한 경우 발행행위가 법률상 무효라 하더라도 그 어음이 제3자에게 유통되면 회사는 어음법 제17조, 제77조에 따라 인적 항변으로 소지인에게 대항하지 못함으로써 그 약속어음에 기한 어음채무를 부담할 위험이 있다”고 전제했다.
다만 “그러한 위험은 그 약속어음이 실제로 제3자에게 유통되기 전까지는 아직 구체화되거나 현실화됐다고 보기 어려움으로 이를 가지고 배임죄의 재산상 손해 요건에 해당하는 실해 발생의 위험이 초래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종전 판례를 폐기했다.
이같은 다수 의견은 배임죄가 ‘구체적 위험범’임을 전제로 한 것이다. 대법원은 배임죄의 ‘재산상 손해를 가한 때’를 현실적인 손해가 발생한 경우 뿐 아니라 재산상 실해 발생의 위험이 초래된 경우가 포함된다고 해석해 왔다. 여기서 ‘실해 발생의 위험’의 정도에 관해서는 경제적 관점에서 재산상 손해가 발생한 것과 사실상 같다고 평가될 정도의 구체적·현실적 위험이 야기된 경우만을 말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입장이다.
배임죄의 기수를 부정하는 결론에서는 다수 의견과 같지만 그 이유를 달리 판단한 별개의견도 제시됐다. 4인의 재판관은 배임죄를 ‘침해범’으로 판단하고 “임무에 위배한 의무부담행위로 인해 채무가 발생하더라도 이는 현실적인 손해가 아니라 손해 발생의 위험에 불과하므로 대표이사가 임무에 위배해 회사 명의로 약속어음을 발행한 경우에도 그 발행행위의 효력 유무나 그 약속어음이 제3자에게 유통됐는지 또는 유통될 가능성이 있는지 등에 관계없이 회사가 그 어음채무 등을 실제로 이행한 때에 배임죄는 기수가 된다”는 의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