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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3)-잃어버린 조국의 침묵 -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
이유진  |  gosilec@l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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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7  17: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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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1926년 동명의 시집에 묶여 세상에 나왔습니다.1) 이 시에 등장하는 ‘님’이 누구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한용운 시인은 시집의 서문에 ‘기룬(찬양하는) 것은 다 님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스님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생애를 통해 ‘기루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님’의 의미를 ‘부처님’ 이나 ‘불교적 진리’, ‘조국’ 등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로서 잃어버린 조국을 ‘님’이라 가정하여 시를 썼다고 가정하고 시의 앞부분을 보니 국권 상실의 슬픔과 원통함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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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일본의 한일합방 계획은 메이지 유신 때 ‘정한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정한론’은 일본이 근대 제국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까운 조선을 식민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1876년부터 한일합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일본은 러일 전쟁 시작과 동시에 대한제국(약칭 한국2))의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한국을 전쟁에서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습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한국 내에 군대를 독자적으로 주둔시키고, 군사작전에 필요한 토지와 노동력을 자유로이 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제1차 한일협약을 통해 한국의 외교·재정고문을 파견하고 산업 분야를 식민지화하였습니다. 당시 재정 고문으로 파견된 메가다는 한국의 화폐 체제를 근대화해주겠다고 했지만, 실상 한국의 상업 자본 형성을 근절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화폐 개혁을 단행햇습니다. 또한 전신, 철도 등의 근대적 시설을 설치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막대한 차관을 들여와, 한국은 경제적으로 일본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5년 12월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군은 왕궁을 포위한 채 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이지용 등을 내세워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했습니다. 고종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고, 이에 일본은 외무대신 박제순의 직인으로 대신 도장을 찍었습니다. 외교권이 상실된 것이죠.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하였습니다. 유생들의 상소와 자결이 이어졌고, 상인들은 장사를 파하며 조약 파기를 요구했습니다. 고종 또한 조약의 부당성과 일제의 침략 행위를 전 세계에 호소하기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하였으나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은 일본에 의해 퇴위당하고 말았죠.

고종이 퇴위한 후 1907년에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각종 법령을 제정하고 중요한 행정을 처분하며 고위 관리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 각 부 차관 자리에 일본인 관리를 임명하는 ‘차관정치’를 실시했습니다. 일본은 법률 제정의 권리를 근거로 한국인의 저항을 봉쇄하고자 다양한 법안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보안법’을 만들어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탄압하였습니다. 때문에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애국 계몽 운동이 크게 위축되었죠. 같은 해 ‘신문지법’을 제정하여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항일 신문을 압박하거나 폐간시켰습니다. 민족교육을 막고자 1908년 ‘사립 학교령’을 제정,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은 학교만 존속하게 하였습니다. 군대도 해산시켰죠.

1907년에 해산된 군인과 13도 의병이 연합하여 연합군을 만들어 마지막으로 저항하였으나, 연합군 수뇌부인 양반과 병사들인 평민들의 의견 대립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일본은 1908년부터 이듬해까지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연합군의 잔여세력을 제압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09년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습니다. 이토의 죽음으로 일본의 언론은 격앙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에 한국 정치 세력들도 기민하게 움직였습니다. 특히 친일단체인 ‘일진회’는 일본이 한국과 합방된다면, 한국 내 정치를 도울 세력으로 자신들을 지목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3) 이에 합방성명서를 먼저 발표하며 마치 한국인들이 합병을 원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1910년 8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한일 병합에 관한 조약이 체결, 공포되면서 한일합병이 성사되었습니다. 병합조약에서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별은 당연했고, 한국인에 의한 모든 정치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의회의 역할을 해야 할 중추원은 설치만 될 뿐 실질적인 활동이 불가능했습니다. 일진회 등 친일세력도 실권을 잡지 못하여 그들의 사악한 욕망이 헛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라가 망했습니다.4)

그러나 한용운 선생은 좌절하지 않고 ‘님의 침묵’에서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은 1910년 병합 이후 식민지 기간 내내 독립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독립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 의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 인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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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로 읽자, 우리역사, 강영준, 창비
2) 근현대사 신문 : 근대 편. 문사철 기획 · 강응천 외 지음, 사계절
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망국 : 오백년 왕조가 저물다, 박시백, 휴머니스트
4)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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