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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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법학자 이시윤의 소송야사(訴訟野史)- 1
  • 이시윤
  • 승인 2017.07.1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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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국 법학계의 거목이자 한국 소송사(訴訟史)의 산 증인인 이시윤 전 재판관이 법률저널에 연재를 시작한다. 법학이라는 황무지에 초석을 다지고 기틀을 세운 장본인이 써내려가는 소송야사(訴訟野史). 널리 존경받는 법조 대가(大家)가 직접 전하는 이 연재에서는 기억해야 할 법조계 주요 인물, 법리나 제도의 배경이야기, 각양각색의 법조 비화까지 폭넓게 다뤄질 예정이다. 연재는 매 격주마다 이어진다.
 

 

 

 

 

이시윤 대륙아주 고문변호사
전 감사원장, 전 헌법재판관

민사실무연구회의 창시자 방순원과 국가배상법 위헌소송

우리나라 건국초기에 민사소송법 학문의 체계화와 발전에 금자탑을 쌓은 이는 이명섭 선생(이화여대 법정대학장, 대법원 판사, 대법원장)과 온산(溫山) 방순원 선생이었다. 두 분은 법학계와 실무계의 가교역할의 대표이기도 하였다.(이시윤, 민사소송법 입문(제2개정판), 22면 시하) 여기서 방순원 선생의 일대기와 업적을 살피는 것은 우리나라 재판사의 중요 단면의 소개를 겸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온산 방순원 선생은 1914년 1월에 충남 온양에서 출생하며 선린상업학교를 거쳐 1935년 2월에 지금의 서울대 법대의 전신이라고도 하는 경성법학 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법원 서기직에 종사하다가 1940년 10월에 일본국 고등문과 사법과 시험에 합격하셨다.

이어 사법관 시보를 거쳐 1943년에 목포지원 판사로 임명되어 법관생활을 하셨다. 해방 후인 1946년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장을 거치셨고, 당시 김병로 대법원장 발탁으로 서울로 전근하며 1949년 9월에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진급하셨다.

이 때의 부장판사 월 봉급이 쌀 한가마 값이 될까말까한 박봉이며, 국가예산이 없어 그 시대는 겨울에 판사들이 방에 난로도 피지 못한 채 코트로 추위를 이겨나갔다 한다. 월급으로 가족 부양이나 자녀 교육이 불가능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판사들의 수난시대였다고 한다. 선생은 부득이하게 법관직을 사퇴하고 변호사 개업을 하여 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기 시작하며 1954년부터는 서울대 법과대학에서 민사소송법 1,2부 강의를 시작하였다. 필자도 대학 재학생으로 수강한 바 있다. 1958년 4월에 이르러 서울대 법대의 전임교수요원(대우교수, 조교수, 부교수)으로 부임하며 1961년 9월에 대법원 판사로 발탁되기까지 민소법 1·2부, 파산법 등을 강의하셨다.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새혁명정부는 사법부도 대폭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대법관과 대법원판사 2원제의 대법원구성에서 대법관제도를 없애고 대법원판사로 일원화되는 새 제도가 생겼다. 한편 박정희 정권의 새 정부는 조진만변호사를 대법원장으로 지명하여 조진만 코트(court)가 생겨났다. 군사정권이 대법관과 대법원 판사의 이원제 구성을 폐기하고 대법원 판사로 일원화한 것은 과거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던 경향신문사에 대한 정간처분 사건에서, 이정권 때는 위법이 없다고 했다가 4·19혁명으로 세월이 바뀐 뒤에는 위법하다고 돌변하는 해프닝의 재판으로 대법관에 대한 불신이 작용한 것으로 안다. 새 대법원은 대법원장 외에 15인의 대법원 판사로 구성하였는데, 이화대학의 이영섭 교수와 서울법대의 방순원 교수를 포함시켰다. 학계인사를 두 명이나 뽑은 것은 구성의 다양성을 고려한 것 외에 두 분이 민사소송법 전문가임에 비추어 민소법의 중요성을 확인한 의미라 볼 것이다.

선생께서는 1961년 9월부터 1972년 10월 유신 때까지 11년간을 최고법관으로 봉직하였다. 대법원에 계시면서 동료 대법관들과 합의를 위해 합의실에 들어갈 때는 ‘신이 아닌 인간이 인간을 최종 재판 한다는 것은 주제를 벗어나는 세상사라는 상념이 들어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기도를 빠짐없이 드렸다고 하셨다. 선생께서는 법관 이전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다. 종교계에서는 방 장로로 유명세를 탔던 것이다.

1971년 대법원은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 단서규정에 대해 9:7로 위헌판결을 하였다.(대법(전) 70다1010) 이는 군인이나 경찰관이 전투나 직무수행 중의 사고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한 경우에 피해자 측이 전상보상금을 지급 받았으면 국가배상법에 의한 불법행위가 성립되어도 별도의 배상청구를 못하게 할 이중배상금지규정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해 선생의 소송법 빈자리를 계승한 필자는 서울대학교 법대 재직 시에 이 규정이 위헌이라고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신국가배상법개설(상, 하) 1967년 6월, 8월호)

이 사건은 서울지방법원 나석호 판사가 첫 위헌판결을 낸 이후 대법원에 상고되었는데, 행정부 측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위헌이 되면 국고지출에 큰 부담이 되니 제발 합헌판결을 하라’는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이를 외면한 채 위헌의 다수의견으로 매듭지었다. 분노한 박정희 권력은 벼르다가, 드디어 1972년 10월 헌법을 개정하면서 그 부칙에다 다른 공직자와 달리 법관에 대해서만 기득권을 무시하고 바뀐 헌법에 따라 재임명 절차를 밟도록 하는 보복규정(?)을 두게 되었다. 이 규정에 의해 재임명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당시 위헌의견에 가담했던 대법원판사 9명 전원을 축출, 합헌의견의 7명은 전원 유임시켰다.

현재는 다수의견에 대한 반론이 없는 것에 비추어 역사의 심판은 다수의견 편이다. 그렇다면 선생은 역사 편에 선 법관이었다. 그러나 이 위헌판결사건은 대법원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때문에 대법원은 정치문제에 개입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되었고, 1987년 헌법개정 시에 대법원이 위헌법률심사권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독일형 헌법재판소가 대법원과 별도로 설치되는 헌법개정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대법원 측이 몹시 후회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 사건은 대법원이 공적으로는 위헌법률심사권을 내어놓은 구조축소의 계기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최고법관인 방순원에게 당시로서는 큰 불운이었다. 이 때 대법원장이었던 민복기 선생이 숙청당한 대법원 판사 다른 여덟 분과 달리 방순원 선생만은 변호사가 어렵다고 하며, 생계책으로 사법연수원 전임강사직을 만들어 강제집행법 강의를 하도록 하였다.

1974년 7월 어느 날 당시 사법연수원 전임강사직을 맡고 계시는 선생께서 제자 격의 5인을 자신의 교수연구실로 초치(招致)하였다. 당시 재야 변호사였던 이재성 전 대법관,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였던 김상원, 윤일영, 박우동 전 대법관과 서울고법 판사였던 필자였는데, 선생께서는 우리가 다 같이 실무민사법의 동호인이니 정기적으로 공동연구모임을 갖자고 제의하였다. 이의 없이 찬동함으로써 선생을 회장으로 하고 박우동 부장판사를 간사로 한 6인 회원의 실무연구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회원이 소수여서 사법연수원의 선생교수연구실에서 모임을 가지다가 재조, 재야 법조인과 법학자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후에 가입희망자가 늘어 국립의료원 스칸디나비아클럽에서 정기모임을 갖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이 모임의 초대 회장이신 선생께서 어김없이 참석, 금일봉을 하사하셨다.

선생께서는 이로부터 40여년이 흐르는 동안 재조법관, 재야변호사 그리고 민사법학자들로 구성되는 큰 연구회로의 성공적 안착에 초석을 놓은 것이다. 나아가 민사실무연구회의 성공모델은 본보기가 되어 훗날 민사법이 아닌 다른 법 분야의 실무연구회가 요원 불길처럼 생겨났다. 방순원 선생의 민사실무연구회 발족의 발상과 육성은 우리나라 실무법학 발전에 새 지평을 열었다. 스타트업(start-up)은 테크놀로지 뿐만 아니라 법 연구분야에도 있다. 학회 창립 40주년 기념행사를 맞아 필자는 방순원 선생을 우리나라 ‘실무법학의 아버지’로 추대를 제의한 바 있다.

40년 간 쌓아온 실무연구회 성과는 회원들의 연구발표문을 집괄한 ‘민사재판의 제문제’만 해도 25권에 달한다. 모임이 ‘사법연수원의 조그만 방실→스칸디나비아클럽 회의실→대법원 큰 회의실’로 규모가 커졌고 모임만 360회, 회원수 600여명으로 여러 실무연구회 중 가장 크다.

연구회가 민사법실무분야 및 민사법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과 법조계의 연구 분위기 조성의 공로는 세상도 알아주어 영산법률문화재단으로부터 2010년 학회 자체가 법률문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이 큰 상은 연구회라는 단체에게보다도 회원들의 압도적인 존경을 받는 방순원 선생이 받을 상이었다.

방순원 선생이 다른 대법관처럼 평범하고 순탄하게 임기를 마치고 은퇴했다면, 이와 같은 실무 민사법학 활성화의 큰 업적을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국가배상소송사건으로 억울하게 퇴출당하는 비극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인생만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옛말이 실감난다. 1990년 최고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90세 영면. 자서전으로 ‘나의 길 나의 선택 법조 반백년’(한국사법행정학회간, 1994년)을 남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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