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2)-개화기 국민 계몽과 국권수호_<해에게서 소년에게>와 ‘애국 계몽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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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2)-개화기 국민 계몽과 국권수호_<해에게서 소년에게>와 ‘애국 계몽 운동’
  • 이유진
  • 승인 2017.07.1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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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최남선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다니다가 경술국치 문제를 의제로 내건 모의국회에서 격분하여 학교를 자퇴한 한국인 유학생들 중 하나였습니다. 민족 정신이 확실한 청년이었죠. 1907년 18세의 나이로 출판기관인 신문관(新文館)을 창설하고 민중을 계몽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했고, 1908년 종합잡지 《소년(少年)》을 창간하여 창간호에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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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六.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저 세상, 저 사람 모다 미우나/그 중에서도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담(膽) 크고, 순정(純情)한 소년배(少年輩)들이/재롱(才弄)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오나라 소년배(少年輩), 입 맛처 주마/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해에게서 소년에게 中〉

“나는 이 잡지의 간행하는 취지에 대하여 길게 말씀하지 아니하리다. 그러나 한 마디 간단하게 할 것은, ‘우리 대한(大韓)으로 하여금 소년(少年)의 나라로 하라! 그리하려 하면 능(能)히 그 책임(責任)을 감당(勘當)하도록 그를 교도(敎導)하여라.’ 이 잡지가 비록 작으나 우리 동인은 이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으로써 힘쓰리라. 소년(少年)으로 하여금 이를 읽게 하라. 아울러 소년(少年)을 훈도(訓導)하는 부형(父兄)으로 하여금도 이를 읽게 하여라.”1) -〈소년(少年)》의 창간사

이게 십대의 글이라뇨.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이 거의 없었던 저의 십대가 절로 반성이 되는 글입니다. 최남선이 3 · 1운동으로 투옥되고 나서 석방된 뒤 친일의 길을 걸었지만, 유능한 계몽 운동가이자 문화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이견이 없습니다.

애국 계몽 운동은 국민의 의식을 계발하여 애국심을 기르고 국가의 힘을 축척하여 주권을 회복하자는 자주적 구국 운동이었습니다. 독립협회 이후 많은 단체들이 결성되어 국민들의 정치사상과 사회의식을 향상시켰는데, 보안회(保安會)는 국민들의 반대 여론을 일으켜 러일 전쟁 중 일본이 한국정부에 황무지를 개척할 권리를 요구한 것을 철회시켰습니다. 이후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1905년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가 결성되었습니다. 헌정연구회는 일제침략을 규탄하는 운동과 함께 헌법의 제정과 의회제도의 실시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자 헌정연구회도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에 1906년 대한자강회로 이름을 바꿔 활동을 재개하였죠. 대한자강회는 정부를 대상으로는 사회 · 교육과 관련한 건의안을 제출하였습니다. 건의안의 내용으로는, 조혼 금지와 부동산 매매 시 증명서를 첨부하는 것, 의무교육의 실시, 사범학교 설립 등이 있었습니다. 대한자강회는 전국적으로 25개의 지회를 설치하고 월보를 간행하여 국민 계몽운동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일제가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려 하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다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죠. 이들 후에는 대한협회가 조직되어 전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정치활동에 대한 감시와 통제, 억압이 날로 심해졌습니다. 이에 비밀단체로 활동하는 신민회가 1907년 조직되었습니다. 안창호를 비롯한 서북 지방의 기독교 신자와 교사,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신민회는 공화정제의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민족교육, 산업, 문화와 관련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이승훈은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죠. 국민경제를 살리기 위해 상공업 기관을 만들어 국가 재정과 국민을 부유하게 하자는 주장도 하였습니다.

평양에 자기회사를 세우고, 평양과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이라는 서점을 운영하였습니다. 최남선의 잡지『소년(少年)』을 주로 판매하던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국민 계몽을 위해 신문도 발행했는데, ‘대한매일신보’가 바로 신민회의 기관지였습니다. 영국인 베델이 양기탁과 공동으로 발행하였는데, 당시 영일동맹으로 일제는 영국인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를 함부로 할 수 없었고, 이에 대한매일신보는 매우 강한 항일 관련 논설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신민회 간부들은 민족의 독립 역량을 키워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외에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간도와 연해주 등지에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였죠. 이회영 · 이시영 등이 재산을 모두 털어 간도에 세운 삼원보와 이상설 · 이승희가 세운 밀산부의 한흥동 등이 대표적인 독립운동 기지였습니다.2)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신민회도 결국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1910년 합병조약 이후 총독부는 안명근의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 간부 105명을 구속하였습니다.(1911년 ‘105인 사건’) 이로 인해 신민회는 활동을 중단할하고, 애국 계몽 운동도 더욱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계몽운동의 영향은 1910년대에 드러났습니다. 1910년대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한 계층이 계몽운동의 영향을 받은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1919년 3·1운동 주도층이 학생인 점도 계몽운동이 학생층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근거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정치형태로 결정한 점 또한 계몽운동의 영향이었다고 볼 수 있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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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세 소년이 창간한 소년 - 1908. 11 (한국잡지백년1, 2004. 5. 15., 현암사)
2) 한국사통론, 변태섭, 삼영사
3) 한국 근대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학회, 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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