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법상 마지막 사법시험인 제59회 사법시험 2차시험이 오는 21일부터 24일까지 나흘간 연세대 백양관에서 치러진다. 사법시험은 로스쿨 제도 도입과 함께 점진적으로 합격인원을 줄여가며 폐지 수순을 밟아왔고 그에 따라 시험장 수도 꾸준히 줄어들었다. 마지막 해인 올해는 단 한 곳의 시험장에서 수험생들의 운명이 갈리게 됐다. 올해 1차시험이 시행되지 못한 탓에 2차시험의 경쟁률은 다소 낮아졌다. 이번 시험의 응시대상자는 196명으로 선발예정인원을 기준, 경쟁률은 3.92대 1 수준이다. 단순 경쟁률은 예년에 비해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이번 시험은 수치상으로 표시되는 경쟁률 이상의 치열한 사투가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2차 응시자는 폐지를 앞둔 상황에서 신규 진입자 없이 유예자로서 실력이 상향평준화돼 있을 뿐 아니라 사법시험 막차에 올라타려는 수험생들의 합격의지가 어느 때보다 강해 실질경쟁률을 상승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2차 응시자들은 4일간 900분의 투혼을 펼친 끝에 50명이라는 소수만이 마지막 사법시험의 합격자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주인공이 된다. 50명으로 마지막이라는 심리적 압박감속에서 숨 막히는 지옥의 레이스를 펼칠 응시생들의 선전을 기원한다. 특히 현행법상 사법시험이 마지막 기회라는 극도의 불안감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배수지진(背水之陳)의 결연한 자세로 공부에 매진하며 끝까지 달려온 수험생들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이며 박수를 보낸다. 지난 세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치열한 노력이 정당한 결실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앞으로 시험까지 남은 시간은 수험생들에게는 너무 짧지만 한편으론 너무 긴 시간이 될 수 있다. 슬럼프로 공부에 집중되지 않을 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겠지만 ‘해낼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주문(呪文)으로 마지막 경주를 마치길 기원한다.
그러나 50명을 제외한 나머지 응시자들은 사법시험을 통한 법조인의 꿈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 우리를 괴롭게 한다. 사법시험 폐지로 젊은이들이 펼칠 희망의 무대가 점차 사라지거나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한다. 이제는 소득의 양극화뿐 아니라 계층의 양극화, 교육 양극화까지 모든 분야에서 이른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 격차가 커지고 중간층이 엷어지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그동안 희망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 왔던 사법시험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질 처지에 있다. 절박한 당사자들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거리에 나서 피켓을 들고 외쳐대지만 문재인 정권과 여당은 ‘남의 일 보듯’ 방관하고 있다.
‘노력이 핏줄’을 넘어설 수 없는 닫힌 사회는 지옥이나 다름없다. ‘하면 된다’는 정신과 꿈을 꺾는 것이 큰 죄악인 이유다. 과거에는 그나마 빈곤 탈출과 사회적 성공을 꿈꾼 많은 젊은이들은 지치고 힘들 때마다 ‘하면 된다’는 신념에 의지하고 채찍질한 끝에 개인적 성취를 일궈낸 사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계층이동은 갈수록 불가능해지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던 자수성가의 신화가 사라지면서 사회가 역동성을 잃어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서울시의 도시정책지표조사에 따르면 서울시민의 30% 정도만 ‘내 노력으로 계층이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서울시민 ‘열의 일곱’은 내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기득권의 사회라는 것이다. 특히 10대의 경우 33.6%만이 ‘노력으로 계층이동을 할 수 있다’고 답해 20대(34.2%)보다 더 비관적 시각을 보였다. 사회 전반의 ‘공평함’에 대해서도 10점 만점 중 4.5점의 낮은 점수를 줬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 1만 달러를 돌파했던 1994년에는 국민 10명 중 6명이 자신의 세대에서 계층이동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뒤 ‘하면 된다’는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3분의1 토막이 난 셈이다. 문재인 정권과 여당은 계층이동의 사다리 복원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특히 고비용 구조인 로스쿨 제도의 보완의 하나로 사법시험이 계속 존치돼야 한다. 부의 불평등이 기회 불평등으로, 기회 불평등이 부의 불평등을 낳는 악순환을 끊는 것은 우선 기회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없애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