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7)-조선 통신사(通信使)의 정치, 사회, 문화적 역할_김인겸의 해외 기행 가사,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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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17)-조선 통신사(通信使)의 정치, 사회, 문화적 역할_김인겸의 해외 기행 가사,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 이유진
  • 승인 2017.06.0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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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우리를 보려하고 이삼천리 밖의 놈이
양식 싸고 여기 와서 대엿 달식 묵었으니
만일 (글을) 아니 지어 주면 낙망하기 어떠할고
무론 노소 귀천하고 다물속 지어주니
(중략)
관백 앉은 데가 멀고 어두워서
얼골은 못 보아도 흰옷을 입었더라
사신네 앉은 데는 가깝고 오랜지라
자서히 바라보니 낮이 적고 턱이 빠고
정신은 있어난대 거등이 경삽하고...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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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을 다녀온 김인겸이 그 경험을 기록한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중 일부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기행문인 셈이죠. 당시에 왜인들이 조선 통신사의 글을 받고 싶어서 몇 달씩 묵으며 기다렸다는 부분에는 문화적 우월감이 드러나고, 일본 관백(천황을 대신하여 정무를 총괄하는 최고위 관직)의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부분에는 오랑캐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드러납니다. 견문을 기록하는 목적이니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노력했지만,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죠.

사실, 김인겸이 관백을 묘사한 부분은 직접 만나 보지도 않고 사행관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 기록한 것이라 합니다. 보지도 않은 사람의 외모를 조롱 섞어 적어 놓은 것이죠. 김인겸은 왜놈들에게 배례(머리를 숙여 절을 하는 일)를 하기 싫다는 이유에서 관백을 만나지 않아다고 합니다. 이러한 무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김인겸을 통신사로서 극진한 대접했다는 것은 그만큼 통신사가 일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통신사가 처음 파견된 것은 조선 초의 일이었습니다. 1418년 세종이 이종무를 통해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고 일본과 외교 관계를 다시 협의하였습니다. 대마도주(對馬島主)와 1443년(세종 25년) 계해약조를 체결하였고, 이 조약을 바탕으로 무역 규칙이 정해졌습니다. 세견선 50석, 세사두미 200석 등 제한된 무역이 성사된 것이죠. 이때 사신을 ‘믿음이 통한다’라는 의미로 ‘통신사(通信使)’라 부르기로 정하였습니다.1)

14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과 일본에 다시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대마도와 에도막부의 노력으로, 1609년(광해군 원년)에 기유약조(己酉約條)가 맺어졌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다시 정상화되었고, 통신사가 다시 파견되기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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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통신사 이야기 : 한일 문화교류의 역사, 나카오 히로시 지음, 유종현 옮김, 한울
 

통신사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에도 막부의 권위가 섰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에도막부는 서쪽의 영주들(현재 큐슈와 시코쿠 주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일본 전국을 완전히 통일하고자 했던 에도막부로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죠. 이런 때에 조선과 에도막부의 외교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은, 가장 가까운 외국에서 에도막부를 공식적 정부로 인정했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 내부에서 막부의 권위가 세워지면 자연스레 서쪽 영주들의 인정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었죠. 막부가 조선과 적극적으로 화해하고자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통신사가 정례(正禮)화되면서 이러한 ‘귄위 세우기’의 측면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에도 막부에 새로운 장군이 즉위하면 조선에서는 통신사를 보내어 이를 축하해주었습니다.

통신사는 문화적으로도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통신사 일행에는 문인 관료뿐만 아니라 화원(畫員) 등의 문화장인들도 포함되었습니다. 통신사의 주체였던 조선 관리들은 성리학과 각종 문화에 정통한 교양인이어서, 하야시 라잔(木羅山)과 같은 일본 유학자들과 유학에 관한 문답을 나누고 내외문서의 격식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 학자들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습니다. 화원들은 일본의 각 지방에서 청해오는 대로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려주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현재 전해지는 그림으로 1748년 통신사에 동행했던 화원 이성린(李聖麟)의 <사로승구도>가 있습니다.2) 일본 측에서도 통신사의 행렬을 보면서 그린 그림들이 있는데, 이러한 행렬도의 유행도 문화교류의 한 측면이라 할 만합니다.

이처럼 통신사는 단순한 외교 사절을 넘어, 일본 정부의 권위를 세워주고 문화를 교류하는 등의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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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통신사 이야기 : 한일 문화교류의 역사, 나카오 히로시 지음, 유종현 옮김, 한울
 

2014 지방직 7급 (일부 수정)

※ (가), (나)에 들어갈 대일본 관계 조약에 관한 내용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cf.

원 기출은 “ㄴ. 계해약조로 이 조약에 의해 왜관이 설치되고 일본과의 제한된 무역을 허가 하였다.”는 문장이었으나, 왜관 설치는 3포 개항 이후의 사실로 표현의 오류가 인정되어 정답 없음으로 수정되었다.3) 위 ㄴ.은 이를 옳게 변형한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전한길 한국사 까페, http://cafe.naver.com/hangilhistory/28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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